안중근 의사의 東洋平和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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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안의사관련 학술 심포지엄에서 중앙대 金鎬逸(김호일)교수가 발표한 논문 安重根義士의 「東洋平和論」내용 일부를 소개합니다. 

  
안중근의사의「동양평화론」저술은 6회에 걸친 재판과정을 끝내고 여순지방법원 법정에서 사형언도가 내려진 뒤부터이다. 즉 1910년 2월 14일 사형언도 후 형의 집행만 남은 상태에서 먼저 3월 15일「安應七歷史」라는 개인전기를 탈고한 후 순국한 3월 26일 사이인 11월 만에 서문과 전감 일부분만 기술한 미완성 작품이다.

원래는 1.서문, 2.전감, 3.현상, 4.복선, 5.문답으로 구성하여 집필하고자 하였으나, 사형이 일찍 집행되는 바람에 완성작은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강의 사정은 그의 저서「안응칠역사」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 뒤에 전옥 율원씨의 특별소개로 고등법원장 평석씨와 만나 담화했는데 나는 사형판결에 대하여 불복하는 이유를 대강 설명한 뒤에 동양대세의 관계와 평화 정략의 의견을 말했더니 고등법원장이 다 듣고 난 뒤에 감개하며 대답해 말하되 "내가 그대에게 대해서 비록 두터이 동정하지마는 정부 주권의 기관을 고칠 수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다만 그대의 직술하는 의견을 정부에 품달 하겠다" 하는 것이므로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고마이 여기며 "이같이 공정한 논평이 귀를 스치니 일생에 두 번 듣기 어려운 일이다.
이 같은 공의 앞에서야 비록 목석이라도 감복하겠다" 하고 나는 다시 청하되 "만일 허가될 수 있다면 동양평화론 1책을 저술하고 싶으니, 사형집행 날짜를 한달 남짓 늦추어 줄 수 있겠는가" 했더니 고등법원장이 대답하되 "어찌 한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 하므로 나는 감사하기를 마지 못하고 돌아와 공소권 청구할 것을 포기했다.
설사 공소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이 뻔할 뿐더러 고등법원장의 말이 과연 진담이라고 하면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어서 였다. 그래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당국은 안중근과의 약속을 어기고 공소권 청구기간도 지난 가운데 동년 3월 26일 사형을 집행하고 말았다.

비록 「동양평화론」을 완성시키지는 못했지만 그가 검찰의 신문과 재판과정에서의 공술내용, 그의 자서전인 「안응칠역사」 및 평소에 그가 발표했던 많은 글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는 바 「동양의 대세의 관계와 평화정략의 의견」을 개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안중근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국내에서는 실력양성에 의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어서 의병전쟁에 직접 참가하여 의병참모중장으로서 일본 군대와 교전하는 독립전쟁에 활동하였고, 그 뒤에는 이토오를 포살하는 개인저격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그의 이와 같은 실천활동에 있어서 기본사상체계는 '한국독립론' 과 '동양평화론' 이었다.
 
 
"성패는 만고에 항상 정해진 이치이다. 오늘날 세계는 동서로 갈라지고, 인종이 각각 다르며, 서로 경쟁하기를 밥 먹듯 하며 이기(利器)연구에 농상보다 더욱 열중하여 새로 전기포(電氣砲), 비행선(飛行船), 침수정(浸水艇) 등을 발명하고 있으니, 이것들은 사람이나 사물을 상해하는 기계들이다.
 
젊은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쟁터에 몰아넣어 수 없는 귀중한 생령들이 희생물처럼 버려져, 피가 내가 되어 흐르고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어 그칠 날이 없다."라고 시작되는 동양평화론의 서(序)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있어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 속에 국제사회가 자국의 이익과 발전을 위하여 약소국을 제물화 하는 시대적 상황을 궤뚫어 보고 있다.
 
이어서 인간존중, 인류의 공동번영이란 대전제는 무시한 채 전쟁이란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패권을 장악하고 이를 위해 다투어 전쟁 무기 개발에 열중하던 시대상황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성과 폭력성을 규탄하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국가가 제정러시아라고 궤뚫어 보고 있다.
 
최근 수 백년 이래로 구주의 여러 나라들이 도덕지심을 다 잊어버리고 날이면 날마다 무력만을 일삼고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하면서도 조금도 기탄이 없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도 노국이 더욱 심하여 그들의 간악한 폭행은 서양ㆍ동양 어느 곳이나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들의 죄악이 천지에 가득하니 귀신과 사람이 다같이 분노할 노릇이다.
 
이러한 제정러시아의 진출을 동양에 있어서 막고 물리칠 수 있는 나라는 당시로서는 일본이었고, 그래서 한국 중국의 지도자와 인민들이 일본을 도와 러ㆍ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끔 도와주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갈파하고 있다.

"이때를 당하여 만일 한국과 청나라 백성들이 일치 단결하여 옛날의 원수를 갚으려 하여 일본을 물리치고 아국 편에 협조하였다면, 일본은 대첩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양국의 백성들이 일본 병사를 환영하고 그들의 군수품을 운반해주고 도로도 닦아주고 적진의 동태를 살펴 보고하는 등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이 승리한 것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일황이 선전포고조서에 "동양평화 유지와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 라고 대의를 밝혔기 때문에 이를 믿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러ㆍ일 전쟁의 결과 한국을 탄압하고 만주의 장춘 등 남의 땅을 점거하니 러시아보다 더 심한 만행이었음을 규탄하고 있다. 더욱이 용과 범의 위세를 가지고 고양이ㆍ뱀 따위의 행동을 하는 섬나라 일본의 행동에 일침을 가하면서 서세동점의 국제정세 속에서 동양 3국이 뭉쳐서 대적하여야 할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같은 황인종인 이웃나라의 가죽과 살을 벗기고 베어서 차지하려고 하니 이는 어부지리를 서양세력에게 그대로 주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국과 청나라 사람의 소망은 하루 아침에 끊기고 말았으니, 그들이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더한다면, 부득이 이족에게 망할지언정 同種에게 욕을 받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이 한국과 청나라의 영토를 침범, 지배하여 동양평화를 깨뜨린다면 한ㆍ청의 지도자 백성들이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을 경고하고 안중근 자신은 먼저 이등박문을 포살하는 전쟁을 솔선 수범하는 것이며, 한국ㆍ중국ㆍ일본의 대표자가 여순구에 모여 평화회의를 개최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양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을 하얼빈에서 거행하였던 것이니 이에 대한 담판이 여순구에서 결정된 후 동양평화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는 것이니 여러분의 심찰을 바랄 뿐이다.

 
문자 그대로 앞 사람이 한 일을 거울삼아 스스로 경계하자는 뜻을 가진 용어가 전감이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는데 있어서 동양3국 즉 한국ㆍ중국(청)ㆍ일본 과의 관계와 청ㆍ일, 러ㆍ일 전쟁에 관한 승패의 원인과 결과를 각국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그 구체적인 경과와 논쟁을 잊지 않고 기술하고 있다.

"예로부터 동서남북 어느 주를 막론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대세의 번복이요, 알 수 없는 것이 인심의 변천" 이라고 갈파하면서, 역사의 진전은 인간의 의지여하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의식을 가지고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아시아대륙에서 치루어졌던 청ㆍ일, 러ㆍ일 전쟁을 통한 동양사회의 흐름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청일전쟁에서 그 전쟁의 원인과 일본이 승리한 이유와 청이 패배한 이유를 민족성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지난 갑오년(1894)의 청일전쟁을 말할지라도 당시 조선에 쥐 같은 도적배들이 동학당의 소요를 계기로 일청 양국의 병사를 끌어 들여, 까닭없이 싸움을 벌여 서로 충돌케 되었다." 라고 청일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전란의 원인이 좀도둑 동학당의 소요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논란의 여지가 다분히 있으나 당시 안중근은 부친 태훈공을 도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입장에서 동학농민군의 반란이 곧 외세를 끌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에서 평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어서 그는 일본이 승리한 이유와 과정에 대하여 "일본은 유신 이후로 민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외교상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그들 동족간의 불화는 하루 아침에 와해되고 다같이 연합하여 한덩이 애국당을 만들어 이같이 개가를 올린 것이다.
이것은 소히 '친절한 남이 경쟁하는 형제만 못하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여 평양전투와 아산만의 풍도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압록강 넘어 요동반도와 여순을 함락 시켰다.
그리하여 마관조약에 의하여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 받고 2억원 배상금을 받았으니 일본으로서 명치유신 이후 기념될만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반하여 안중근은 물산이 풍부한 영토와 인구가 수 십 배 되는 청국이 패배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반문하면서 "예부터 청국인은 중화대국으로 자칭하고, 외방을 이적이라 부르며 교만하고 오만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며, 더구나 권신이나 척족들이 제멋대로 국권을 농간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맺고 상하가 불화하였으니 이같이 봉변을 당하는 것"이라고 하여 자만과 권위주의, 국론의 분열, 지배계층에 대한 불신, 정치의 문란 등이 전쟁에 있어서 참패를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둘째 제정러시아의 극동정책에 대한 우려와 일본의 과실을 논하고 있다. 3국 간섭에 의하여 제정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하면서 청국이 요동반도를 환부 받게 만들어 주면서, 여순조차를 성공시켜 부동항을 얻기 위한 남하정책의 실상을 비판하고, 그 모든 것이 일본의 청국과의 전쟁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러시아는 불과 수년 사이에 민첩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여순을 조차한 후에 군항을 확장하고 철도를 복건 했다. 이런 일의 근원은 생각해 보면, 러시아 사람들은 수 십년 동안 봉천 이남서 대련 여순 우장 등지에 부동항 한 곳을 억지로 써서라도 가지고 싶은 불 같고 밀물 같은 욕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고 하면서 러시아의 남하정책 실상을 파헤치고 아울러 "그러나 그 이유를 따져 보면 모두가 일본의 과실이었다.
이른바 구멍이 있으면 바람이 들어오고 자기가 되니까 남도 된다는 격이다. 만일 일본이 먼저 청국을 침범하지 않았다면 러시아도 감히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제 도끼에 발등 찍힌 것이었다." 라고 청일전쟁의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셋째, 러ㆍ일 전쟁의 원인, 그 성격, 서구열강의 대책, 한국ㆍ청국의 대응 등을 예리한 형안으로 분석하여 그 득실을 비판하고 있다.

"아아! 이들 양국간의 대참화는 끝내 면치 못하게 되었구나! 그 원인은 필경 어디에 돌아갈 것인가? 이러한 사실은 동양에 일대 전철(前轍)이 되는 것이다. 일ㆍ러 두 나라가 각각 만주에 군대를 파견할 즈음에, 노국은 시베리아 철도로 80만 군비를 실어 보냈다. 그리고 일본은 바다를 건너고 육로를 거쳐 4ㆍ5군단과 군비 군량을 육지와 바다 양편으로 요하 일대에 수송하니, 비록 일정한 분란이 있다 하나 어찌 위험치 않겠는가?" 결코 만전한 계책은 못 되는 것이니 참으로 부질없는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안중근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독립보장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일본이 제정러시아와 전쟁을 한다는 것이 언어도단이며 한국의 주권을 무시하고 한국인의 의사를 배반한 한국과 무관한 전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요행히 연승을 거두었으나 함경도는 아직 거치지 못했고 여순구도 격파하지 못하고 봉천 또한 점령하지 못했던 때였다.
 
만약 이 때 한국의 관민이 일치 단결하여 일어섰다면 을미년(1895) 일본인이 한국의 명성황후 민씨를 무고히 사살한 원수를 갚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견문을 사방에 보내고 함경도 평안도 간의 노국 병마와 교통하여 불의에 습격케 하여 충돌케 하고 청국 또한 상하가 협동하여 전날 의화단 때에 행동했던 것과 같이 하였다면 그들 또한 갑오년(1894)의 숙원(일본군에게 대패함)은 갚았을 것이다."라고 하여 한국과 청국이 러ㆍ일 전쟁 중에 일본을 돕지 말고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에 대항하였더라면 동양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러면서 일본을 상대로 한국과 청국이 서로 다툰다면 이 틈새를 이용하여 영국ㆍ프랑스ㆍ미국ㆍ독일ㆍ이탈리아ㆍ오스트리아ㆍ포르투갈ㆍ그리이스 등이 산동반도 발해만으로 군대를 집결시키면서 위협을 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일본ㆍ청국이 대항하게 되고 이에 따라 동양은 자멸할 수 밖에 없다고 설파하고 있다.
 
넷째, 러ㆍ일전쟁의 강화조약이 미국의 중재 하에 그것도 미국 영토인 포오츠머드에서 체결하게 된 이유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것을 인종간의 차별로 보면서 조약문에 한국이 러시아와 처음부터 관계가 없는데 한국문제를 삽입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을 그 중에 침입하여 우월권이 있다고 주장한 것은 근거도 없으며 합당하지 못한 것이다. 예전에 마관조약 체결 시에는 본시 한국은 청국의 속방으로 하였기 때문에 해 약장은 간섭을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과 러시아 양국간은 애초부터 관계가 없는데도 어찌하여 해 약장 중에 제멋대로 집어 넣었는가? 일본이 한국에 대해 이미 큰 욕심을 품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자유자행하지 못하고 구라파 백인종의 약장에 첨입하여 영세한 문제를 만들어 놓았는가? 도무지 몰책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전감에서 안중근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강한 경종을 주고 있다.
 
"오호라!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동종인방을 해치는 자는 끝내 독부의 환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는 같은 황인종이면서 한국을 침략하여 지배하려고 한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정책을 전면 공격하여 언젠가는 그 값을 치를 것이라고 강하게 논하였다.

이상 안중근이 옥중에서 집필한「동양평화론」 중 전감의 내용인 바 이 전감도 전부 서술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현재 서, 전감의 일부분을 가지고 「동양평화론」 전체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안중근이 주장한 동양평화에 대한 견해가 단편적으로 신문 조서 등에 나타나 있고, 특히 안의사가 1910년 2월 17일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과의 면담 내용인 '청취서'에 동양평화에 대한 안중근의 이상이 담겨져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ㆍ청국 그리고 일본은 세계에서 형제의 나라와 같으니 서로 남보다 친하게 지내야 한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 형제간의 사이가 나쁠 뿐이며, 서로 돕는 모습보다는 불화만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형편이다.

일본이 오늘날까지의 정책을 고치겠다고 세계에 발표하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다소 치욕이 되는 점도 있을 것이나 이는 불가피한 일이다.
새로운 정책을 여순을 개방한 일본, 청국 그리고 한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해 평화회의를 조직한 뒤 이를 공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는 일이다.
여순은 일단 청국에 돌려주고 그것은 평화의 근거지로 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패권을 잡으려면 비상한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하는 것이다. 여순의 반환은 일본의 고통이 되기는 하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익을 주는 일이며 세계 각국이 그 영단에 놀라고 일본을 칭찬하고 신뢰하게 되어 일본 청국 한국이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얻기에 이를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동양의 중심지이며 항구도시인 여순을 영세중립지로 만들어 각국 대표에 의한 상설위원회를 설치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것을 시행토록 주장하였다.
 
첫째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여 3국 인민 중에서 회원을 모집하고 재정확보는 1인 당 회비 1원씩을 모금하여 운영할 것.

둘째 3국이 공동하여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공용하는 화폐를 발행하여 금융ㆍ경제면에서 공동발전을 도모할 것.

셋째 각국의 중요한 지역에 평화회의 지부와 은행지점을 개설하여 재정적 안정을 도모할 것.

넷째 영세 중립지 여순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본군함 5ㆍ6척을 정박시켜 놓을 것.

다섯째 3국의 청년들로 군단을 편성하여 최소한 2개국어로 교육시켜 평화군을 양성할 것.

여섯째 일본의 지도아래 한ㆍ청 두 나라의 상공업을 발전시켜 공동으로 경제발전에 노력할 것.

일곱째 한ㆍ청ㆍ일 세 나라가 황제가 국제적으로 신임을 얻기 위하여 합동으로 Rome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을 것.

마지막으로 안중근은 일본에 대하여 한국과 청에서 행한 침략만행을 반성하여 '일출노소(日出露消)'의 단계에서 '일냉일이(日冷日異)' 단계에 들어서 있음을 직시하여 대처하기를 촉구하였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1910년 3월 25일 사형집행 전날 안중근의사가 국내외의 동포들에게 보내는 유언 내용이다.

안의사는 나라가 곤궁할 때 솔선 수범하여 민족운동에 앞장 서서 교육구국운동, 의병투쟁, 침략자에 대한 응징 등으로 대한 남아의 기개를 세계에 드높인 애국자이다. 그래서 그를 단지 의사나 열사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세계와 사상을 바탕으로 평화의 사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측면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안중근의사의 「東洋平和論」은 주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세운 지표로 그의 독립운동에 있어서 기초적 배경이 된 사상체계였다. 이 이론은 그의 성장과정에서 경험했던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개화사상과 접목하고 기독교사상을 새로 받아들여 종합적이고도 보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동양평화론은 19세기말 이래 개화사상가들의 대외인식에서 나타난 국가의 중립론의 단계를 넘어선 이론이었으며 일본 정한론자들의 아시아 연대주의론과는 거리가 있는 논리였다.

19C 제국주의시대라는 서양의 침략과 수탈의 국제정세 속에서 동양제국이 생존권을 보존키 위해서는 공동대처방안이 모색될 수 밖에 없었고 그 가장 값진 이론이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었다.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1주일 전부터 집필하여 서와, 전감의 일부만 집필을 끝내고 현상, 복선, 문답은 탈고를 하지 못한 채 순국하여 완성작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집필 부분과 검찰조서, 재판기록, 그의 자서전, 기타 많은 유묵을 통하여 대체로 동양대세의 관계와 평화정락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내용이라고 본다.

그는 서문에서 동양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을 하얼빈에서 거행하고 동양평화문제에 대한 의견을 제출한다고 밝혔으며 전감에서는 첫째 청일전쟁의 원인과 일본의 승리 및 청의 패배, 둘째 제정 러시아의 극동정책과 일본의 과실, 셋째 러ㆍ일 전쟁의 원인, 서구 열강의 대책, 한국ㆍ청국의 대응, 넷째 러일전쟁의 조약체결, 다섯째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에 대한 경종의 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동양평화론이 지향하는 바는 동양평화를 영구히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안중근은 그의 청취서에서 극동의 분쟁지인 요동반도의 여순을 영세중립지로 삼자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순을 한국ㆍ청국ㆍ일본의 3국이 공동관리하여 동양인끼리 서로 침탈하는 행위를 중지하고 서양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동양 3국이 함께 번영해 나가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사입력: 2007/05/05 [16:54]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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