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장군인가, 안중근 의사인가?
대한독립군 역사에서 누락된 1908년 전후의 안중근 의병역사
 
단지12 닷컴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의거 이후 일제법정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일관되게 '대한의군 참모중장 독립특파대장 안중근'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이것은 안 의사가 자신의 신분을 민간인이 아닌 의병, 독립군, 즉 군인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실제로 안중근은 1908년 전후해 당시 항일운동 본거지였던 러시아 연추에서 무장 독립군을 결성해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해 조국독립을 쟁취한다는 취지로 독립군을 조직하고 여러차례 국내진입 작전을 펼쳐 전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법정은 안중근의 이같은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끝까지 자신의 신분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며 군인 신분임을 강조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순국직전,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자신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친다는 결연한 군인정신을 나타낸 것입니다.
 
비록 일본법정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 후손인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장군으로 호칭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군인에게는 '의사'나 '열사' 같은 호칭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해방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신분을 독립군으로 공식화 하는데 큰 관심을 갖은 흔적이 없습니다.
안 의사가 일제 법정에서 그 토록 주장했던 독립군으로의 신분을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도 인정하려는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안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를 단행하기 전에 러시아 연추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은 생생하게 전해오고 있습니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안중근 의사의 신분을 제대로 평가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독립특파대장 안중근'은 치밀한 특공작전으로 일본제국주의 대륙침략 원흉인 이등박문을 사살합니다. 
 
안중근의 이같은 작전 성공은 그후 중국과 조선인들에게 항일투쟁의 용기를 불어넣게 됩니다.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것입니다. 따라서 안 의사의 1909년 10.26 특공전전은 독립운동의 효시가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이제라도 안중근은 이제 의사가 아닌 대한의병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으로 신분을 찾아야 합니다.
 
다음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디지털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 수록된 일제시대 대한독립군 역사입니다. 

이곳에도 1908년을 전후해 러시아 연추지역을 본거지로한 안중근 독립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항일독립군의 역사를 제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전의 의병항일투쟁 역사도 독립군 역사에 당연히 포함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지금까지 왜곡되고 있는 대한독립군 역사자료를 여기에 옮깁니다. <단지12닷컴>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1919년 북간도(北間島)에서 조직된 항일무장투쟁단체
 

왕칭현[汪淸縣] 펑우퉁[鳳梧洞]을 근거지로 하고, 국내에도 들어와 군사항쟁을 했다. 간도국민회(間島國民會)와 군사행동을 같이하여 일반적으로 국민회소속 군대로 알려져 있다. 홍범도가 사령관이었고 부사령관은 주달(朱達), 참모장은 박경철(朴景哲)이었으며 200여 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1919년 8월 간도국민회가 노령에서 구입한 신식무기를 공급받고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을 습격했고, 9월에는 갑산을 공격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0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강계와 만포진을 점령하고, 자성(慈城)에서 3일간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측 사상자는 70여 명이었으나 독립군측에는 사상자가 없었다.
 

의병전쟁 이후 10년 만에 국내에서 전투를 하여 승리한 것이다. 이 사실에 경악한 일본군 당국(용산 조선군사령부)은 급히 많은 병력을 보내어 압록강 연안을 엄중히 경비하게 했다. 1919년 겨울에 공식적으로 간도국민회 소속 군대가 되었으며 전투력을 강화했다.
 

1920년 3월 15~ 27일 사이에 8차에 걸쳐 두만강을 건너 온성 일대에서 기습전을 벌이는 등 무산·종성 등의 국경지대를 계속 공격했다. 1920년 5월에 무장단체들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창설했다. 6월 국경초소를 습격하여 약 1개 소대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에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었으나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의 사상자가 400여 명에 달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7월에 북간도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되자 동도독립군서(東道獨立軍署)에 편입되었다.
 

10월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대응하기 위해 북간도의 독립군이 재편되어 총병력은 3,500명이 되었으며 1대대를 3중대로, 1중대를 3소대로 나누어 27개의 소대를 두었다.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보복을 피해 우수리 강을 건너 러시아로 넘어가 대한독립단에 합류했으나 일부는 만주로 되돌아왔다. 한때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인양성에도 노력했다.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3·1운동 이후 동·북간도를 중심으로 독립전쟁론이 대두하는 가운데 1919년 무장항일운동을 목적으로 만주 창바이 현[長白縣]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지령에 따라 창바이 현 17도구(道溝)의 이동백(李東白) 집에서 이은경(李殷卿:李殷鄕)·이태걸(李泰傑)·윤덕보(尹德甫) 등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창바이 현에 본단(本團)과 지단(支團) 그리고 국내에 지단을 설치하여 국내 상황탐사와 군자금확보에 주력했다.
 

1920년 2월 당시 임원으로는 단장 이은경, 부장 이태걸, 군사부장 이동백, 재무부장 윤덕보, 참모부장 김찬(金燦), 경찰부장 정삼성(鄭三星), 문사부장 김종기(金宗基), 외교부장 조훈(趙勳), 소집부장 김정익(金鼎益), 공창부장 김진무(金振武) 등이었는데 대부분 함경남도 출신이었다.
 

함경도 각 지방에서 군자금과 단원모집에 주력하여 7월에는 이동백이 함경남도 풍산군의 주병록(朱丙祿)과 연락하여 풍산과 이원에 각각 지국을 설치했다. 이들 지국에서는 지역상황, 외국신문·잡지에 게재된 조선독립에 대한 여론, 3·1운동 후 일본 정부의 방침과 독립투사의 주소·성명, 일본 경찰의 배치,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지방민심의 동태 등을 탐지하여 보고했다.
 

8월에는 김택률(金澤律)이 본단에 가입한 뒤 함경도에 파견되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단원 김정익 등 23명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2월 김창렬(金昌烈)은 강응진(姜應鎭)과 함께 이원군 자산가들에게 군자금납부 독촉장을 발송하고 강용수(姜龍秀)·강익현(姜益鉉) 등을 입단시켰다.
 

1921년경 일제의 탄압으로 본부를 창바이 현 8도구 독암리 또는 푸쏭 현 화카이 산(花開山)으로 옮겼으며, 부서와 임원이 개편되어 6월에는 이희삼(李熙三)이 총단장으로 선출되었다. 새로운 부서로서 총무·법무·통신·훈련·무기감수수령·주찰(週察)·경호·통신사무국장 등이 신설되었고, 부장(副長)·경찰·군사·외교 등의 부서는 폐지되었다.
 

7월에는 중대장 이영식(李永植), 참모장 이병호(李炳浩), 제1소대장 고인식(高仁植), 제2소대장 김낙걸(金洛傑), 제3소대장 안용도(安瑢道) 등으로 재편된 제1중대 28명이 평안북도와 함경남도에 출동하여 일본 경찰과 교전했다. 그러나 대규모 군사활동이 불리하게 되자, 소대단위로 분산하여 각지에서 일제 기관을 파괴하고 일본 경찰을 사살했다.
 

또 9월에는 제1중대 3소대 1분대 분대장 김병묵(金秉默)과 대원 10명이 함경남도 갑산군 동인면 금정포주재소를 폭파하고 순사부장 고바야시[小林淸治]를 사살한 뒤 무기·현금·탄약 등을 탈취하고 무사히 본영으로 돌아왔다. 11월에 소대장 김성연(金成淵) 이하 26명은 함경남도 산수군 오인면 운전리 경찰주재소를 폭파하고 일본경찰 3명을 사살했다. 같은 해 10월 임시정부 산하의 대한국민단으로 재편성되었다.
 

[의군부(義軍府)]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종래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동북 만주 각지에 산재해 있다가 1919년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서 이범윤(李範允)·진학신(秦學新)·최우익(崔友翼)·김청봉(金淸鳳)·김현규(金鉉圭) 등이 주동이 되어 그 해 4월 조직하였다.
 

조직은 본부와 중부로 나뉘었고, 활동지를 화룡(和龍)·왕청(汪淸)·혼춘(琿春) 등지로 확대시켰으며, 자금은 교민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조직의 간부는 본부 총재에 이범윤, 총사령 김현규, 참모장 진학신, 총무부장 최우익, 군사부장 김청봉, 외교부장 신립(申立), 통신부장 지우강(池雨江)이었고, 중부 참모장 고평(高平), 서무부장 이을(李乙), 재무부장 김종헌(金鍾憲), 외교부장 김종환(金鍾煥), 통신부장 박재(朴在), 군법원장 허승완(許承完), 헌병대장 최상운(崔尙雲), 군기감독 강문주(姜文周)였다.
 

의군부의 이와 같은 이원적 조직은 중앙 통제를 약화시켜 각지 의군부의 분산된 독립군부대를 개별적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중부의군부는 ‘조선독립군’으로 행세하였으며, 의군부 소속 허근(許根)·강창대(姜昌大)·박재눌(朴載訥)·강영찬(姜永讚) 등은 ‘구국단(救國團)’이라는 독립군단체를 조직하였다.
 

1년2개월만에 6개 대대로 증강, 1919년 7월 항일투쟁과 반동세력의 분쇄를 위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동맹해 효과적인 작전을 개시하였다. 1920년 6월 국경경찰과 헌병을 격퇴시키고 한국인 순사 및 헌병보·밀정들을 위압해 간도 용정 국자가(間島龍井局子街)와 두만강 대안 각지의 친일배들을 크게 위축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군경의 공격과 동북군벌(東北軍閥)의 내습으로 크게 제약을 받아 주로 야간공작에 치중하였다.

1920년 8월 일본경찰의 교사를 받은 중국군의 공격으로 고평 지휘의 감사대(敢死隊) 150여 명이 불가피하게 전투를 벌여 쌍방 모두 큰 손실을 당하였다. 이에 의군부본부는 최우익의 3개 중대를 출동시켜 고평의 군대와 합동해 큰 전과를 올렸으나, 최우익·이을·강도천(姜道天) 등 13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그 뒤 의군부는 서로 독립적으로 군사행동을 했던 본부와 중부가 합동해 내부를 강화시켜 북로군정서의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당시 어랑촌전투(漁郎村戰鬪)에 참가했고, 두도구(頭道溝) 일대에서는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청산리대첩 후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하면서 서일·홍범도 등이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할 때 의군부도 가맹해 1921년에 흑룡강(黑龍江)을 넘어 노령으로 갔다. 거기에서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고, 시베리아에 근거지를 둔 한국인 무장부대가 모두 소련에 의해 강제로 무장해제를 당하자 연해주(沿海州) 지방에서의 항일독립투쟁은 어려워졌다.
 

그 뒤 여러 차례의 군사연합회의를 거쳐 1924년 이범윤이 회장에 추대되고 김좌진·최진동(崔振東)·조성환(曺成煥)·나중소(羅仲昭)·김규식(金奎植) 등이 위원이 되어 다시 독립군단을 조직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1922년에 통의부(統議府)의 직제 및 인물 배치에 불만을 품은 군민대표가 만주 환인현(桓仁縣)에서 국내 일본기관의 파괴를 목적으로 조직한 의군부도 있었으나, 1923·1924년에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신민부(新民府) 등에 통합, 흡수되었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1919년 김좌진(金佐鎭)을 사령관으로 북간도에서 결성된 무장독립군단체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결성]
 

북간도에 거주하던 서일(徐一) 등 대종교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1919년 4월에 결성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은 무장독립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8월에 김좌진·조성환(曺成煥) 등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민족주의자들과 합작해 산하에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를 조직했다.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10월에 하나로 통합해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되었는데, 12월 상하이 임시정부의 지시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런데 서간도에서 한족회(韓族會)·신흥무관학교 등이 이미 독립군부대를 편성하고 임시정부로부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란 명칭을 받았기 때문에, 이와 대비하여 일반적으로 북로군정서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간부들은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玄天默), 총사령관 김좌진 등이다.
 

[사관훈련소 설치와 군대육성]
 

군정서는 왕칭 현[汪淸縣]의 시다보 스리핑[西大坡十里坪]의 산림에 근거지를 두고 1,100여 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1920년 2월초에는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해 교관 이범석(李範奭)과 졸업생 장교 박영희(朴寧熙)·오상세(吳祥世) 등을 비롯한 다수의 장교와 각종 지원을 받아, 근거지 내에 사관훈련소를 설치하고 300여 명의 청년을 선발·입교시켰다.
 

사관훈련소는 6개월의 속성과정으로, 정신교육·역사·군사학·병기·부대지휘·체조·구령법 등을 가르쳤다. 이에 따라 대한군정서는 7월경에 사관훈련소 졸업생들이 구성한 연성대(硏成隊)를 중심으로 3개 대대에 약 1,100여 명의 병력을 갖추었다.
 

한편 무기확보에도 힘을 기울여 소총뿐만 아니라 약간의 기관총과 박격포까지 보유해 당시 동북만주의 최강의 부대로 손꼽혔다. 군정서는 세력권 지역 내에 34개의 분국으로 구성된 치밀한 경신조직(警信組織)을 만들어 각 지역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연락 및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게 했다. 이 분국은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는 조직망으로도 활용되었다.
 

[청산리전투 및 대한독립군단으로의 재편]
 

1920년 10월 일제는 만주의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해 훈춘[琿春] 사건을 조작해 2만 5,000여 명의 군대를 간도로 진격시켰다(間島出兵). 하지만 군정서는 그에 앞서 8월에 밍푸더[盟富德]의 중국군과 비밀협상을 맺어 이미 서대파 근거지를 떠나 600여 명의 정예군만을 이끌고 그해 10월 12일에 싼다오거우[三道溝] 청산리에 도착해 진지를 구축했다. 뒤쫓아온 일본 37여단 소속의 1만 명과 10월 21~26일 새벽까지 10여 차례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해 일본군을 격퇴했는데, 이것이 청산리전투이다.
 

김좌진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전투에서 백운평(白雲坪) 전투 등 5차례의 전투를 단독으로 수행했으며, 어랑촌(漁郞村) 전투 등 2차례의 전투를 홍범도(洪範圖)가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와 공동으로 수행했다. 군정서군은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후, 계속 이동하여 1920년 12월말경에는 북만주의 밀산(密山)에 도착하여 총재 서일의 명의로 독립군단체들의 대동단결에 의한 군사통일조직체 건설을 촉구하는 격문을 발송했다.
 

1921년 1월 헤이룽 강[黑龍江]을 건너 러시아령 연해주로 갔고, 4월에는 일본군을 피해 각지에서 모인 여러 독립군단체들을 통합해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사변으로 무장을 해제당하고 간부들이 북만주로 탈출하면서 대한독립군단은 해체되었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1919년 5월 남만주 서간도에 무장독립운동단체로 설립된 군정부(軍政府)
 

원래 한족회의 산하단체로 출발하여 처음에는 명칭을 군정부(軍政府)로 했다가, 3·1운동을 계기로 상해 임시정부 파견원 안정근(安定根)과 김병헌(金炳憲:일명 王三德)의 제의로 서로군정서로 확대·개편되었다.
 

주요간부로는 초대 독판 이상룡(李相龍), 부독판 여준(呂準), 정무총장 이탁(李鐸), 군정총장 양규열(梁圭烈), 참모장 김동삼(金東三), 교관 신팔균(申八均)·김경천(金擎天) 등이 임명되었다. 1919년 5월 3일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여 독립군 간부양성에 주력했으며, 치다오거우[七道溝] 콰이다마오쯔[快大帽子] 산골짜기와 구산쯔[孤山子]·허둥쯔[河東子]에 각각 분교를 두었다.
 

이무렵 교장은 이세영(李世榮)이었으며, 연성대장(鍊成隊長)은 이청천(李靑天)이었다. 오광선(吳光鮮)·신팔균(申八均)·이범석(李範奭)·김경천(金擎天) 등이 교관으로 활약했으며, 하사관반과 특별훈련반으로 나누어 하사관 3개월, 장교 6개월, 일반 독립군 1개월 과정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8월 현재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군수는 2,000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예하부대로서 상해임시정부 직속의 의용군(義勇軍)을 편성하여, 국내에 있는 적기관을 파괴하고 친일분자·밀정 등을 숙청했다. 의용군은 뒤에 주만참의부(駐滿參義府)에 편입되었다.
 

서로군정서는 재만한인의 경제문제에 특히 유의하여 농업을 장려하는 한편, 중국인지주와의 분쟁해결과 대중교섭상(對中交涉上)에서 재만한인의 권익옹호에 노력했으며, 민병제도를 실시하고 교관을 지방에 파견하여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교육·산업 우선주의를 주창한 원로 이상룡·여준·이탁 등에 반대하여, 좀더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주장한 현정경·현익철·이시열·이호원·홍원경 등과 3·1운동 이후 망명해온 장명환·김관성·이춘상 등 다수의 소장청년파들이 관뎬 현[寬甸縣] 상루거우[香爐溝]에서 회의를 열고 1920년 2월 서로군정서를 이탈하여 새로이 광한단(光韓團)이라는 독립군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1920년초 나남의 일본군 19사단과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21사단, 그리고 관동군이 연합하여 공격해오자 서로군정서는 1920년 8월 군인 500명으로 교성대(敎成隊)로 편성하여 이청천의 인솔하에 제2의 근거지인 백두산북록 안투 현[安圖縣]으로 향하고, 서로군정서 기관은 별도로 어무 현[額穆縣]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어무 현에 근거지를 옮긴 후 곧 군정부 재조직에 착수하여 1921년 5월에 다시 서로군정서를 재출발시켰다. 개편과정에서 위원제를 채택하여 집행위원장 이탁, 경리위원장 이진산(李震山), 학무위원장 이척서, 법무위원장 김동삼, 참모장 황학수(黃學秀), 총사령관 박용만(朴容萬) 등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박용만이 일제에 투항한 뒤 내분이 일어나고, 1923년 남만통일회를 개최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통합되었다.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이 해 4월 봉천성유하현삼원보(奉天省柳河縣三源堡)에서 조직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많은 동포가 만주로 이주하는 기회를 이용,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박양섭(朴陽燮) 등 각 단체대표 560여 명이 모여 각기 분립된 단체를 해체하고 독립쟁취를 위한 단일기관으로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김원섭(金元燮)·최영호(崔永浩), 군사부장 전덕원, 참모부장 조병준,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재무부장 강세헌(康世憲), 서무 김일(金逸), 고문 안병찬(安秉瓚)이 임명되었으며, 이 밖에도 많은 부서와 간부들이 있었다.
 

지방조직으로는 전덕원·김승학(金承學)·백의범(白義範) 등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맹헌규(孟憲奎)·유일우(劉一優) 등은 만주 집안현(集安縣)·장백현(長白縣)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국내외 모두 100여 개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지역에는 거류 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여 구관(區管)을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국내의 지단조직은 국내 총지단장에 홍제업(洪濟業), 평안북도 정우범(鄭禹範), 평안남도 안창일(安昌一), 경기도 한덕리(韓悳履), 용천군 이후관(李厚觀), 철산군 안병철(安秉哲), 영변군 신태익(申泰翼), 정주군 조석균(趙錫均), 태천군 백낙기(白樂基), 영유 이항로(李恒老), 가산 오봉희(吳鳳熙), 수안 최일호(崔一浩) 등이었다.
 

만주지방 조직으로는 장백현 총지단장에 유일우, 집안현 유수림자(楡樹林子) 최남표(崔南表), 집안현 외차구(外疎溝) 홍승국(洪承國) 등이었다. 이들은 3, 4명씩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의 조선총독부 예하 경찰을 습격하고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대시켜갔다.
 

8월 최고 1,500명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그 중 700명의 독립군을 하얼빈(哈爾濱) 주둔 백계 러시아부대에 파견해 군사훈련을 받게 하고, 9월경 노령(露領)으로도 2개 소대를 보냈다. 이들은 시베리아에서 훈련과 무기 구입에 주력하였다.
 

12월 본부 밑에 4개 중대를 편성해 남만주 제1사단이라 하고, 무송현(撫松縣)에 사단본부를 설치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따라 조병준이 평안북도 독판(督辦)이 되어 공채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3, 4월 결사대들이 평안도 신의주·의주 등에서 친일세력의 처단에 주력하였다.
 

또한, 본단의 목적인 남만주와 우리 나라 내부의 기맥을 상통해 독립의 완전한 성취를 도모하고자 전국적으로 모군(募軍)·모금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중에서도 태천(泰川) 지단에서는 유림 김인수(金仁馬) 등의 활동으로 다수 단원을 포섭해, 본단 내지분치기관임시통칙(內地分置機關臨時通則)에 의해 의용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폭약을 구입, 관공서 파괴를 계획하던 중 다수의 단원이 붙잡혔다. 또한, 유일우·김병연(金秉淵)·박기연(朴基淵) 등은 장백현 일대에서 많은 자금을 모금했으며, 안도(安圖)·무송현 등지와 연락하면서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연호문제로 노년층과 청년층이 대립하기도 하였다. 단군기원 또는 융희를 주장하는 박장호·백삼규·전덕원·이웅해(李雄海)·김평식 등의 기원독립단과 대한민국 연호사용을 주장한 조병준·신우현(申禹鉉)·변창근(邊昌根)·김승학 등의 민국독립단으로 분리, 대립했지만, 독립운동에는 상호 협력하였다.
 

1920년 7월에 한족회, 대한청년단연합회와 통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총영으로 개편되었다
 

[정의부(正義府)]
 

1925년 만주에서 조직한 항일무장 독립운동단체
 

1919년 3·1운동 전후 독립전쟁론에 기반한 만주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지방별로 항일무장단체를 만들었는데, 간도 일대만 50여 개 단체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 단체들은 각 지방의 자생적인 조직체였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군영으로 조직되지 못했다.
 

이에 남만주의 각 군사단체 사이에 통일운동이 일어나 1925년 1월 지린[吉林]에서 개최된 양기탁(梁起鐸)·지청천(池靑天)·오동진(吳東振) 등 혁명거두회의에서 정의부가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길림민회·서로군정서·의성단·독립군단 등 12개 독립군단체를 통합한 것으로, 주로 통의부(統義府)를 토대로 조직되었다.
 

주요간부는 중앙집행위원장 이탁(李鐸), 총무위원장 김이대(金履大), 민사위원장 김호(金虎), 군사위원장 지청천, 재무위원장 오동진, 교육위원장 김진호(金鎭浩), 법무위원장 이진산(李振山), 조선의용군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김동삼(金東三) 등이었으며, 7개 중대 병력을 가졌다.
 

정의부는 1925년 3월부터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했는데, 제5중대장 김석하(金錫夏)와 제7중대장 정이형(鄭伊衡) 등이 18일 평안북도 벽동군 시해출장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 등 3명을 사살했으며, 19일 새벽 다른 중대원이 초산군 추목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 등 4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했다. 7월 4일 의용대원 김귀진(金貴振) 등이 철산군 주찬관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 3명을 사살했다.
 

참의부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정의부는 펑톈 성[奉天省]과 지린 성을 세력범위로 하여 8만 7,000여 명의 한인주민이 있었는데,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산업·교육에도 힘썼다. 장교 중에 유능한 자를 선발하여 광둥[廣東]의 군관학교에 파견·유학시켰으며, 각지 한인부락에는 소학교를 설립하여 초등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했다.
 

류허 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에 동명중학을 설립하여 중등학술을 가르쳤으며, 관뎬[寬甸]에 화성의숙(華成義塾)을 설립하여 혁명간부를 양성했다. 언론기관지로 〈전우〉·〈대동민보〉를 발행했으며, 경제기관으로 농민조합과 농업공사를 설립했다. 또한 어무 현[額穆縣] 등 3곳에 황무지를 매입·개간하여 독립운동자의 가족을 안주·정착하게 하고 청년훈련소를 각 중요지대에 설립했다.
 

그러나 1927년 12월 오동진이 일제의 밀정에 의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곧 군사조직 및 중앙진용을 개편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3통합운동으로 국민부(國民府) 조직에 통합되었다.
 

[참의부(參議府)]
 

1923년 만주에 있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민국임시정부육군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라고도 한다. 군사·민정을 통괄하는 기관으로서, 만주라는 유리한 근거지와 한인동포들의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했다.
 

[창립 배경]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독립전쟁론에 기반을 둔 만주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지방별로 강력한 지도통제력을 갖춘 항일무장단체를 만들었는데, 간도 일대에만 50여 개 단체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은 각 지방의 자생적인 조직체였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군영으로 조직되지 못했다.
 

반면 일제는 독립군의 세력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만주출병을 감행하여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는 무차별 살육·약탈을 자행했다. 또한 중국 동북군벌들에게 압력을 넣어 독립군 근거지를 박탈하도록 하여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조직과 기반을 잃고 분산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1922년 6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은 통합군사조직체로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했다. 같은 해 8월 통군부 참가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를 열고 새로운 통합운동단체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통합군대로 대한통의부의용군(大韓統義府義勇軍)을 결성했다.
 

그러나 이듬해 내부의 복벽파와 공화파 간의 갈등으로 의군부·통의부로 다시 분열되었고, 그 과정에서 통의부의용군 제1·2·3·5중대가 항일통일전선 결성을 목적으로 독자적 행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강력한 무장투쟁 전개를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군정부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조능식(趙能植)·백광운(白狂雲) 등을 상해임시정부로 파견, 임시정부 직할군단을 설치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김승학(金承學)·이유필(李裕弼) 등을 만주에 파견하여 새로운 군정부 창립에 협력하게 했다.
 

[창립과 조직]
 

1923년 8월 만주의 지안[輯安]·푸쑹[撫松]·안투[安圖]·퉁화[通化]·류화[柳化]·창바이[長白] 지역을 관할로 하여 새로운 군정부인 참의부가 창립되었다. 참의부는 중앙에 중앙의회를 두고 군사와 민정을 통괄하며 13개 지방행정구와 5개 무장중대로 구성되었다.
 

간부진은 참의장 겸 1중대장 백광운, 중앙의회의장 백시관(白時觀)을 비롯하여, 최석순(崔碩淳)·최지풍(崔志豊)·김창빈(金昌彬)·김창천(金蒼天)·허운기(許雲起)·박응백(朴應伯)·김소하(金篠厦) 등이었다.
 

1924년 백광운이 통의부 대원들에게 살해되자, 최석순을 참의장으로 하고 김선풍(金旋風)·김우근(金宇根) 등을 간부로 참여시켜 재정비했다. 이후 1925년 고마령(古馬嶺)에서 일본군의 습격으로 많은 간부가 전사하자, 1926년 봄 윤세용(尹世茸)을 참의장으로 선임하고 이관진(李觀鎭)·계담(桂擔)·이춘(李春)·김우일(金又一)·송남형(宋南亨)·김학봉(金學鳳) 등으로 새 간부진을 구성했다.
 

다음해 윤세용이 사임하자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김승학을 참의장으로 선임하고, 마덕창(馬德昌)·김소하·계담·양기하(梁基瑕)·백시관 등을 주요간부로 조직을 개편했다. 1928년 4월 참의장 밑에 군사·외교·조직·선전·재무·민사·교통·법무 등 8부서와 비서장을 두었다. 민사 담당의 중앙의회는 의장 밑에 7개 행정구와 각 구당 3명의 위원을 두었으며, 군사조직은 5개 중대와 중앙호위대로 구성되었다.
 

[군사활동]
 

참의부는 한만국경지대에 가까워 만주의 독립군정부 중 가장 활발한 항일전쟁과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는데, 작전의 대부분은 20~30명을 단위로 한 게릴라전이었다. 창립 때의 500명의 병력에서 1928년까지 600명 이상의 병력을 계속 유지했는데, 관할 지역 내에서 병역의무제와 재향군인단을 통한 군사훈련, 황푸군관학교[黃軍官學校 및 모스크바 국제사관학교 출신의 한인장교들의 전술 지도 등이 전투력 증대요인이었다.
 

1923~25년 50회 이상의 항일전·국내진공작전으로 가장 눈부신 군사활동을 전개했고, 특히 1924년 5월 19일 장창헌(張昌憲)·한웅권(韓雄權)·이춘화(李春化) 등 8명의 대원은 평안북도 위원군 마시탄(馬嘶灘)에서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 일행을 기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5년 3월 평안북도 초산의 일제기관 기습공격 후 고마령에서 작전회의를 하던 중 일본 군경 120명의 기습을 받아 최석순 등 29명이 전사하는 타격을 입었다. 이후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계기로 일제 및 동북군벌의 탄압이 가중되고 일부 간부들이 변절하여 전력이 약화되었다.
 

1928년 12월 신민부(新民府)·정의부(正義府)와의 3부통합문제로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김동삼(金東三)·김상덕(金尙德) 계열의 부분 통합체인 혁신의회(革新議會)에 김승학이 참여하면서 일방적으로 참의부의 해체를 선언하자, 심용준(沈龍俊) 등은 국민부(國民府)에 참여함으로써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후 1929년 10월 참의부고수세력의 지도자 김소하가 일제에 체포되면서 완전히 와해되었다.
 

[신민부(新民府)]
 

1925년 3월 10일에 북만주의 닝안 현[寧安縣] 닝안 성[寧安城]에서 조직된 민족운동단체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과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를 주축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그중에서도 김좌진 계열인 대한독립군단의 북로군정서가 중심이다. 구성원의 대부분이 단군을 믿는 대종교(大倧敎) 신자로 대종교적 민족주의와 대종교적 공화주의를 표방했다. 대한제국의 무관학교와 신흥학교 등 군관계 출신의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독립운동 방법론으로는 무장투쟁 우선론이 지배적이었다.
 

신민부는 군사조직과 자치기구를 갖추었으며, 위원장 김혁(金赫), 민사 최호(崔灝), 군사 김좌진, 외교 조성환(曺成煥), 재무 최정호(崔正浩), 실업 이영백(李英伯), 교통 유현(劉賢), 선전 허백도(許白島), 교육 정신(鄭信), 보안대장 박두희(朴斗熙) 등이 선임되었다.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군구제(軍區制)·둔전제(屯田制)를 실시했으며,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의 설치를 시도했다. 또한 기관지 〈신민보 新民報〉를 간행하고 산업 진흥을 위해 공농제(公農制), 식산조합(殖産組合)·소비조합의 설치 등을 시도하기도 했다.
 

재만동포에 대한 자치활동과 아울러 북만주에 거주하는 친일한국인 암살을 비롯하여 국내에 사람을 보내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정의부·참의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규모가 큰 독립운동단체로 성장하여 5년간 지속되었다. 그 세력은 닝안을 중심으로 북만주의 중둥선[中東線] 일대와 북간도 북부까지 미쳤다.
 

그런데 신민부 안에는 군정파와 민정파의 2파가 있어서 서로 갈등이 심했다. 이들 2파는 1928년 12월과 1929년 3월에 각각 해체되었고, 그에 따라 신민부도 결국 해체되었다. 군정파는 1929년 7월에 조직된 한족총연합회의 기반이 되어 한국독립군·한국독립당으로 발전했고, 민정파는 국민부에 참여하여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으로 발전했다.
 

[3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의 교민자치단체이자 무장항일단체인 정의부(正義府)· 참의부(參議府)· 신민부(新民府)의 통합운동
 

1927년 8월 정의부 제4회 중앙총회에서 "만주지역의 운동전선을 통일하기 위하여 신민부와 참의부의 연합을 적극적으로 도모할 것, 전민족운동전선 통일을 위하여 유일당촉성(唯一黨促成)을 준비할 것"을 결의함으로써 만주지역에서 유일당 조직의 전단계인 3부통합이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다.
 

이후 1927년 12월부터 1928년 1월 사이에 정의부의 간부 오동진(吳東振)과 신민부의 간부 김혁(金赫)·유정근(兪政根) 등이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자 통합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게 되어 1928년 2월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간부들은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회합을 갖고 4월 중에 3부통합회의를 갖기로 결의하는 등 통합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 4월에 정의부의 간부 김동삼(金東三)이 김원식(金元植)과 함께 통합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신민부를 방문하여 강력한 무장투쟁의 전개를 위해 3부의 군부가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28년 5월에는 정의부를 비롯해 만주에 있는 18개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민족유일당 결성을 논의했으나 참의부와 신민부의 대표는 단속이 심해 참석하지 못했다. 이 회의는 기존의 단체를 중심으로 조직하는 협의회파(協議會派)와 지방적·파벌적 성격을 많이 띤 기존의 단체를 모두 해체하고 개인을 본위로 조직하자는 촉성회파(促成會派)가 대립하여 결렬되었다.
 

이에 민족주의진영의 유일당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정의부는 신민부와 참의부를 결속해 민족진영 내부의 통일을 강화하고, 나아가 만주에 있는 항일운동단체들에 대한 영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1928년 7월 신민부·참의부에 3부통일회의의 개최를 제의했다.
 

8월에 참의부는 김희산(金希山)·김소하(金篠夏)·김강(金剛) 등을 대표로 파견했으나 신민부는 제의에 동의하면서도 군정·민정 양파의 대립으로 대표를 파견하지 못했다. 정의부·참의부에서는 이백파(李白波)를 신민부에 파견하여 교섭했으나 군정파와 민정파의 대립으로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편 정의부는 1928년 8~9월에 제5회 정기중앙의회에서 민족유일당 조직에 대해 논의한 결과 협의회측에 동조할 것을 결정하자 집행위원 이청천(李靑天) 등은 직무를 포기한다는 성명을 내고 탈퇴했다. 3부통일회의는 1929년 9월 지린[吉林]에서 개최되어 민족유일당 조직과 3부통일 등의 안건을 토의했으나 대표들의 의견대립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 3부의 대립문제이다. 정의부의 주도권에 반발한 신민부와 참의부는 3부를 해체할 것, 촉성회와 협의회의 분규를 타파하고 전만주 일반의 대당주비(大黨籌備)를 실행할 것 등 새로 유일당을 조직하자고 주장했으나 정의부는 현재의 각 단체를 기본으로 하는 단체중심조직론을 주장하여 정면으로 충돌했다.
 

둘째, 대표권 항쟁문제로 인한 내분이다. 신민부는 민정파와 군정파에서 대표를 따로 파견했는데(민정파는 申肅·金墩 등, 군정파는 金佐鎭·鄭信 등), 양파는 서로 상대방은 반동분자이며 자파만이 정식대표라고 주장했다.
 

셋째, 참의부 대표의 소환문제이다. 참의부는 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소하를 밀정으로 사형선고를 내리고 정의부에 집행을 위탁했으나 대표 중 한 사람인 참의부 간부 김승학(金承學)이 김소하가 밀정이라는 것을 부인하자 참의부는 대표전부를 소환했다.
 

3부통합회의가 결렬된 후 신민부·참의부는 물론 정의부까지도 자체 내의 분열이 표면화되어 그해 연말부터는 다시 독립운동단체의 정비작업이 추진되고 3부는 해체되었다. 즉 김좌진·황학수(黃學秀)·정신 등 신민부의 군정파와 김희산·김소하 등 참의부 주류, 이청천·김동삼 등 정의부 탈퇴파가 주축이 된 촉성회측은 1928년 12월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했고, 현익철(玄益哲)·이웅(李雄)·김이대(金履大) 등 정의부 주류와 심용준(沈龍俊)·이호(李虎) 등 참의부 일부, 송상하(宋尙夏)·독고악(獨孤岳) 등 신민부 민정파는 1929년 3월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했다.
 

[국민부(國民府)]
 

1929년 정의부 중심의 전민족유일당협의회파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모체로 결성한 남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국민부는 1927년 4월 15일 제1회 대표자회의를 계기로 만주지역에서 활발하게 조직·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과 삼부통합회의가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하고 분열된 결과로 조직되었다.
 

즉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들은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위해 다양한 논의를 했으나, 개인 가입을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와 단체중심조직론을 내세운 전민족유일당 사이의 견해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립했다. 그리하여 신민부 군정파를 중심으로 한 촉성회 계열은 1928년 12월 하순 혁신의회와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결성했다.
 

이에 반해 협의회 계열은 1929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조직했다. 1929년 5월 28일 지린 성[吉林省]에서 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 현익철)를 구성하고, 산하에 민사·경제·외교·군사·교육·법무·교통위원회와 중앙호위대 및 8개 중대의 군대를 조직했다. 또한 1929년 12월 이당치국(以黨治國), 이당공작(以黨工作)의 원칙에 입각하여 국민부를 영도하기 위해 유일당으로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했다. 이때 독립군은 조선혁명당 산하 군사위원회 지도를 받는 조선혁명군으로 개편되었다.
 

국민부는 '재만 조선민족의 문화양상·사업발전·공안유지, 재만 조선민족의 단일자치기관의 실현, 한·중 양 민족의 혁명적 협동작업'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었다. 이를 위해 교육·선전활동의 일환으로 남만학원(南滿學院:학원동인지〈봉화 烽火〉발간)을 설립하고 기관지 〈조선혁명 朝鮮革命〉을 발행했다.
 

재만 한인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농민들의 경작권옹호운동과 1925년 6월에 체결된 미쓰야 협약[三矢協約]으로 제약받게 된 한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활동도 전개했다. 또한 반국민부파(反國民府派)와 일제 앞잡이 및 주구기관의 제거와 군자금모집 및 독립군의 모병을 위한 군사활동을 했다.
 

1931년 12월 신빈(新賓) 사건으로 대다수의 간부들이 일제에 의해 체포되자, 1932년말경 조직을 개편하여 조선혁명당의 한 부서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1934년 9월 18일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이 일제에 의해 피살되자, 1934년말 고이허(高而虛)를 통령(統領)으로 하는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에 흡수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1929년 12월 남만주 일대의 독립운동단체들을 포괄해 결성된 유일당(唯一黨)
 

만주에서 활동하던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가 민족유일당운동과 3부(三府) 통합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각각 내부분열을 일으켜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로 분리된 후 국민부가 조직한 남만주의 유일당이다.
 

1929년 4월 남만주 일대의 군소독립단체들을 통합해 국민부가 조직되었다. 같은 해 9월 20일 국민부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혁명과 자치를 분리해 혁명사업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위임하고 국민부는 자치행정만 전담할 것과 군사부를 폐지하여 종래의 조선혁명군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속하게 할 것을 결정했다. 12월 20일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의 발전적 형태로서 조선혁명당이 결성되었다.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일대의 유력한 정당으로서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사업을 완수하는 것을 당면임무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남만주 한인사회의 자치행정기관인 국민부와 무장조직으로 군사적 임무를 전담하는 조선혁명군과는 표리일체의 자매기관으로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이끌어가게 되었다.
 

당의 결성 당시 중앙위원으로는 현정경(玄正卿)·현익철(玄益哲)·이웅(李雄)·고할신(高轄信)·최동오(崔東旿)·장승언(張承彦)·김보안(金輔安)·장철(張徹)·고이허(高而虛)가 선출되었다. 중앙당부를 랴오닝 신빈[遼寧新賓]에 설치하고 지린 성[吉林省],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에 길흑(吉黑)특별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위원으로 이탁(李鐸)·김돈(金墩)·김이대(金履大)·박형건(朴炯鍵)·김인기(金仁基)를 선출했다.
 

당이 결성될 때 만주에서는 1928년 장쭤린[張作霖] 폭사사건, 1931년 7월의 만보산(萬寶山) 사건, 9월의 만주사변 등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때 재만한인은 중국으로부터 일제의 앞잡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었고 일본으로부터는 반일인물이라는 의심과 탄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선혁명당은 중국과 빈번히 교섭하여 한중합작으로 일제침략에 대처하는 길을 역설하여 반일무장투쟁의 한·중 협동체제를 결성하는 데 기여했다.
 

1932년 1월초 싱징 현[興京縣]에서 중앙위원회를 열고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중국이 만주에 대해 주권을 상실하는 데 따른 진용정비문제와 한중합작 등의 문제를 토의했다. 그러나 이 회의가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1월 5일 회의 현장에서 간부 이호원(李浩源)·이동산(李東山)·김보안·장세명(張世明)과 조선혁명군 장교 이규성(李奎星)·차용륙(車用陸)·전운학(田雲學) 등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어 3월초까지 계속된 일본경찰의 검거로 83명의 조직원이 체포되었다.
 

그후 일제의 검거를 피한 간부들은 조직을 재정비하고 고이허를 위원장 대리로, 양서봉(梁瑞鳳)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한편 조선혁명군은 1929년 7월의 류허 현[柳河縣] 쩌우자우푸[鄒家堡] 전투, 1932년 1월 6일의 양기하(梁基瑕) 부대의 항전 등 무장항쟁을 벌였다.
 

특히 1932년 3월에는 싱징 현 융링제[永陵街]에서 조선혁명군 1만여 명과 중국의용군 2만여 명이 합동으로 일·만 연합군과 7월까지 정규전을 벌였다. 1932년 3월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광범한 반일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관동군을 직접 만주에 투입했다. 이에 따라 1934년말 일본군의 토벌작전에 항전하는 한편 홍군(紅軍)의 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당·정·군의 조직을 일체화하여 조선혁명군정부를 결성하고 고이허를 최고책임자로 선출했다.
 

이후 활동은 주로 조선혁명군의 반일무장항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1935년 9월에는 한중항일동맹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5년 일·만 군경의 주민분리 정책과 초토화작전으로 항일무장투쟁은 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또 홍군의 공동전선전술로 한인무장부대의 일부가 홍군에 가담하게 되어 조선혁명당의 무장항쟁도 약화되었다.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1920년 12월 만·소국경지대로 결집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군부·도독부 등 10여개 독립군부대가 통합하여 조직된 무장항일부대
 

청산리대첩 후 홍범도(洪範圖)·이청천(李靑天)·김좌진(金佐鎭)·안무(安武) 등이 거느리는 독립군부대는 새로운 항일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밀산에서 합류했다. 여러 독립군단의 대표들은 회의를 열어 장기 항전을 결의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노령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한 뒤 조직의 명칭을 대한독립군단으로 했다.
 

간부진용을 보면, 총재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김좌진·조성환(曺成煥), 총사령관에 김규식(金圭植), 참모총장에 이장녕(李章寧)이 추대되었고, 여단장에 이청천, 중대장에 김창완(金昌煥)·조동식(趙東植)·오광선(吳光鮮) 등이 선임되었다.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명이었다.
 

밀산에서 월동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3월 부대별로 이동을 시작하여 노령 연해주와 흑룡강일대에서 활동중이던 문창범(文昌範)·한창해(韓滄海) 등의 도움을 받아 만·소국경 하천인 우수리 강을 넘어 이만(Iman)에 도착했지만, 대한독립군단 모두가 러시아로 이동하지 않았다.
 

밀산에서 서일은 자결하고, 이범석·김홍일 등 많은 독립군은 만주에 그냥 잠복하게 되었으나 김좌진만은 이만까지 갔다가 만주로 돌아왔고 그 일부는 노령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중 이만 시로 들어간 이청천부대는 홍범도의 소개로 소련 적계군 한인부대장인 박일리아 연대장을 알게 되고, 박일리아는 소련교관을 한국독립군부대에 배치하여 전술법을 교육하는 등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그러던 중 1921년 2월 러시아 군관학교출신으로 러시아혁명에 참가한 오하묵(吳夏默)의 주선으로 치타에 있던 완충정부(緩衝政府) 수석 카라한과 항일독립군사이에 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군사협정에 따라 독립군은 그들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아 독립군 양성을 위해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를 설립하고 백계군 토벌에 종군했다.
 

이러한 사실을 내탐한 일본은 소련정부에 대하여 강력한 외교공세를 전개,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한편 혁명 후 국내내란을 불안했던 소련은 일본과의 불화를 경계, 한국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소련당국은 1921년 6월 22일 흑룡강 자유시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독립군에게 무장해제의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격파한 자유시사변을 일으켰다. 이때 독립군부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고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만주로 되돌아왔다.
 

이후 1922년 8월 대한군정서·의군부·혈성단·국민회·대한광복단·대진단·대한의민단·대한신민단·대한독립단 대표들에 의해 재조직되었다. 총재에 이범윤, 총사령관에는 김좌진이 선임되었으며, 김규식·최진동·현처묵·강국모·남성극·최호·박두희·유현·이장녕 등이 활동했다. 이들은 만주 동녕현을 중심으로 쑤이펀 강(綏芬河)에서 하얼빈을 잇는 동지연선(東支沿線)을 따라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이때 앞의 독립군부대가 공식적으로는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1938년 중국의 한커우(漢口)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김원봉(金元鳳)에 의해 조직된 한국독립무장부대. 구성원은 총대장 김원봉(金元鳳), 부대장 신악(申岳), 정치조(政治組) 김학무(金學武), 조원(組員) 이달(李達), 선전대장 김창제(金昌濟), 총무대장 이집중(李集中), 서무주임 이해명(李海鳴), 외교주임 한지성(韓志成) 등 200명이다.
 

식민지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동포를 규합하고 파시스트군벌의 압제하에 있는 모든 민중을 연합하여, 적 일본군벌을 타도하여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완성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난징(南京)을 함락한 뒤 우한삼진(武漢三鎭)을 공략목표로 삼아 쉬저우대회전(徐州大會戰)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7월에 청쯔현(成子縣)의 조선독립군이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으로 이동하여 훈련을 마친 뒤 한커우로 들어왔다.
 

이때 일본군의 우한삼진의 함락이 눈앞에 다다랐으며, 중국군은 필사적으로 항전하였으나 패전하였다. 이에 중국 당국과 조선청년들이 협의, 의용대를 구성하여, 참전할 것을 선언하였다.
 

최초의 편제는 2구대(區隊)로 편성되었는데, 제1구대는 대장 박효삼(朴孝三)이 지휘하여 후난(湖南)·장시(江西)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제2구대는 이익봉(李益鳳)의 지휘로 안후이(安徽)와 뤄양(洛陽)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본부는 처음에 광시성(廣西省) 구이린수동문외(桂林水東門外) 동령가(東靈街) 1호에 있었으나 후일 충칭시(重慶市) 아관보(鵝官堡)로 옮겼다.
 

그리고 많은 당원을 만주로 밀파하여 밀산현(密山縣)을 본거지로 동지를 규합하고, 일만군(日滿軍)의 후방을 교란시킨다는 커다란 공작방침을 세웠다. 그런데 이를 위한 경비 및 교통상의 문제 등으로 인해 불가능하다고 판달될 경우에는, 중국군 제1부대의 후방으로 진출하여 동대의 선전을 위한 중국군의 원조공작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공작마저 어려울 경우에는 상해·톈진(天津)·북경 등 요지는 물론, 일본·조선·대만·만주 등 각지에 첨예분자를 밀파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활동은 전투, 일본군정의 탐지 또는 점령지역내의 정보수집, 일본인 포로 취조 및 사상공작, 일본군대에 대한 선전공작, 중국군대 및 민중에 대한 선전공작, 적문서의 번역 등 다양하였다.
 

그리고 1941년 3월 초 북경·허베이성(河北省) 스먼(石門)·허난성(河南省) 장더(彰德)·칭다오(靑島)·상해·허베이성 충샹현(鍾祥縣) 등지에 무장정치공작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초창기의 병력은 20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1940년 2월에는 314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광복군이 창군되자, 이에 참가하는 자가 생기고 일부 이탈자가 발생하여 1941년 5월에는 81명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194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8차 국무회의에서 광복군에 편입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해 5월 제30차 국무회의에서 광복군에 부사령직의 증설에 따라 의용대 총대장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고 의용대는 5월 18일자로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다. 이를 계기로 광복군은 3지대로 증강되었다.
 

제1지대의 편성은 김원봉이 지대장을 겸임하고, 총무조장 이집중, 제1구대장 이소민(李蘇民), 제3구대장 박효삼이 임명되었다. 의용대의 조직으로 독립군이 국제정규전에 독자적 부대 단위로 직접 참전 및 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것이 기초가 되어 광복군의 조직이 증대될 수 있었다.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무장독립군으로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항일군대
 

[창설배경 및 과정]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으로 약칭함)는 1920년대초 독립운동 방략을 둘러싼 국민대표회의의 실패로 해외독립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 등 임정유지론자들에 의해 유지되어갔다. 1927년 이후 김구가 주석에 취임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으나 여전히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1월 이봉창의거, 4월 윤봉길의거를 계기로 한중연합전선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 이후 임정의 외교노선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물론, 내부적으로도 점차 무장독립투쟁론이 우세해져갔다. 특히 1938년 가을 김원봉(金元鳳)의 조선혁명당이 한커우[漢口]에서 중국정부의 후원을 받아 '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항일군사활동을 전개한 것이 큰 자극이 되었다.
 

한편 광복군의 창설계획은 1919년 임정수립 당시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연원을 두고 있으나, 1936년을 전후하여 광복군 창설이 본격화하였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임정은 군무부(軍務部)에 군사위원회를 설치, 군사계획을 세우고 군사시설에 필요한 예비공작과 일제에 대한 특무공작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국민당정부가 퇴각함에 따라 임정도 난징에서 창사[長沙]·류저우[柳州]로 이전하여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한 임정은 5월부터 광복군 창설을 위해 장제스[蔣介石] 주석과 교섭을 추진했다. 당시 중국군사위원회에서는 김원봉(金元鳳)의 조선의용대를 후원하고 있었기에 주저하였으나, 결국 1940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의 설치안을 승인했다.
 
이에 임정은 1940년 9월 17일 충칭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典禮)를 개최, 광복군 창설을 공표했다. 선언문에서 "광복군은 1919년 임정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국총통 장제스의 특별허락을 받아 조직되었으며 중화민국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창군목적을 천명했다.
 

그러나 선언문에서 드러나듯이 광복군의 활동은 자주성에 커다란 한계가 있었다. 광복군은 국군양성 및 훈련을 통해 궁극적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데 목적을 두었으나, 국민당정부의 원조·승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제약과 한계를 지니고 출발했다.
 

충칭 당국은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이후에도 1년 동안이나 그 승인을 보류해오다가 광복군이 ' 한국광복군구개행동준승'(韓國光復軍九個行動準繩 : 이하 '행동준승'으로 약칭함)을 준수할 것을 조건으로 공작활동을 허락했다.
 

[활동]
 

중국군사위원회와의 관계
 

광복군은 중국의 지원하에 중국 내에서 활동해야 하는 한계성을 지니고 출발했기에 처음부터 중국정부와의 군사협정문제가 현안문제로 되었다. 중국군사위원회는 1941년 11월 15일 광복군의 '한국광복군구개행동준승'을 일방적으로 임정에 통고했다.
 

임정으로서는 중국측 지원 없이는 활동이 불가능했으므로, 11월 19일 제8차 임정 국무회의에서 행동준승을 승인했다. 행동준승에 의하면, 광복군 총사령부는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인사·경리·훈련·공작 등 일체 사항에 대해 중국군의 명령·허가를 받도록 규정했으며, 광복군과 임정과의 관계는 '고유한 명의관계(名義關係)'를 유지할 뿐이라고 했다.
 

이는 광복군이 중국군의 일개 보조·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 군사협정이었으며, 임정의 지위도 의문시되는 것이었다. 또한 광복군은 중국 내에서뿐 아니라 국내에 진공할 때도 중국 군사당국의 명령계통에 복속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주요직책에 중국군 장교를 앉혀 광복군을 완전히 통제했다.
 

이에 임정에서는 광복군의 현황을 타개하기 위해 준승폐기 교섭을 추진했다. 교섭은 행동준승 수락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1944년 중국 군정부장 허잉친[何應欽]이 '폐기용의공한'을 임정에 보내올 때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공한 이후에도 1945년 4월 4일에야 중국측의 최후 승낙을 받아냈다.
 

신협정은 광복군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중국 군사당국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중국의 통수권을 광복군이 중국 국경 내에서 작전할 때에만 한정하여,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 이후의 독자성을 보증했다.
 

그리고 중국의 원조가 일단 임정을 거쳐 전달됨으로써 광복군에 대한 임정의 위신과 권위가 되살아났으며, 원조를 차관형식으로 대체함으로써 임정의 국제적 위신도 서게 되었다. 한편 중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갇힌 한인사병을 광복군에 흡수함으로써 광복군 병력증강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불과 해방 4개월 전에 성립되어 광복군을 발전시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조직편제]
 

광복군의 성립 초기에는 항일전을 전개할 전투부대의 편성과 전선홍보전에 주력했다. 초기에 편성된 광복군지대는 대원확보를 위한 임시적인 편제였으나, 점차 대원을 확보하고 조선의용대가 합편됨에 따라 실질적인 단위부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초기의 조직편성은 먼저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다음에 각 지대·구대 조직 및 대원을 충당하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광복군은 성립 당시 최고통수부에 김구·유동열(柳東說)·조성환(曺成煥)·조완구(趙琬九) 등이 있었고, 총사령에 이청천(李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 부관장에 황학수(黃學秀), 주계장에 조경한(趙擎韓), 참모에 이복원(李復源)·김학규(金學奎)·공진원(公震遠)·이준식(李俊植) 등 불과 12명으로 창설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만주독립군 출신으로 낙양군관학교의 교관·학생으로 연결된 인물들이었다. 1940년 11월 임정은 광복군 총사령부를 시안[西安]으로 옮기고 4개 지대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제4지대는 설치되지 못했으며, 제1지대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산시[山西] 방면으로, 제2지대장은 고운기(高雲起)를 임명하여 쑤이위안[綏遠] 방면으로, 제5지대장은 나월환(羅月煥)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개편한 것이었다.
 

한편 1941년 3월 강남일대 초모공작을 위해 김문호를 단장으로 4명의 특파단을 설치하여 장시 성으로 파견했다. 이러한 초모공작의 결과, 총사령부 창설 1년 만에 광복군은 300명의 인원을 확보하였다. 한편 임정은 광복군에 대한 최고 통수기관으로서 총사령부의 창설을 계획하였으나, 1941년 11월에 중국측이 요구한 행동준승을 수락함으로써 좌절되었다.
 

행동준승에 따라 광복군 요직에는 중국군 장교가 배치되었으며, 총사령부 소속 장교 56명 중 한인장교가 불과 13명인데 중국인 장교는 43명에 달하고 각 지대에도 중국인 장교를 임명·배치했다. 총사령부 기구도 종전의 10개 참모부서에서 참모·총무·정훈처 등 3개 부서로 축소, 개편되었다.
 

그러던 중 1942년 4월 20일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부사령제를 신설하여 부사령에 김원봉을 임명했다. 조선의용대가 제1지대로 개편됨으로써 종전의 제1·2·5지대는 통·폐합되어 제2지대로 개편되고, 이범석이 지대장에 임명되었다. 제2지대는 시안에 본부를 두고 산시 성[陝西省], 허난 성, 산시 성[山西省]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무렵 푸양[阜陽]에 특파된 김학규가 제3지대를 창설, 광복군은 모두 3개 지대로 재편되었다. 개편된 광복군의 1942년 10월을 전후한 시기 병력은 제1·2지대 270여 명, 제3지대는 70명 내외였다. 광복군의 재편성은 곧 중국관내 한인무력의 통일을 뜻하며, 광복군 활동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광복군은 화북이나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처럼 독자의 강령, 즉 운동노선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광복군 자체가 당시 중국관내의 통합된 독립운동세력인 임정의 무장세력이었던만큼 임정의 운동노선이 곧 광복군의 운동노선이었다. 이런 점에서 1941년 11월 임정이 해방을 대비하여 채택한 건국강령이 곧 광복군의 지향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44년 4월 임정에서는, 행동준승 폐기와 신군사협정의 체결, 국내활동을 하던 제무장대오(諸武裝隊伍)를 임정의 통일지휘하로 편입, 연합국에 의한 한적사병포로(韓籍士兵捕虜)의 인도와 훈련, 적진정세공작 등 13개항의 군사정책안을 구체화한 군무부공작계획대강을 작성, 실천에 옮겼다. 1943~44년 광복군의 각 지대는 본격적인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는 한인청년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들 한인청년의 대부분은 광복군 제3지대 김학규 지대장의 지휘하에 중국 제10전구 사령부에 부설된 중앙군관학교 제10분교 한광반(韓光班)에 입교하여 광복군의 간부로 양성되었다.
 

[군사활동]
 

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전투력 배양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를 뒷받침할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특히 행동준승으로 광복군의 활동은 중국군측의 요청에 의한 것이나, 독자적인 활동이라 하더라도 제한된 여건 속에서 대적선전·정보수집·포로심문 등 정보선전에 국한되었다.
 

초모공작과 더불어 광복군의 주요임무였던 선전공작은 대내적으로는 광복군의 존재와 사명을 국내에 인식시켜 동포들의 총궐기를 촉구하고, 일본의 대중(對中) 작전에 대한 방해공작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독립국으로서의 민족문화와 역사를 알리면서, 광복군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할 자격과 의사가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 발발과 동시에 동남아로 전선이 확대되고, 일본군 내에 한적(韓籍) 사병이 늘어나자 광복군은 점차 연합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영국군은 버마(지금의 미얀마) 작전에서 일본군에 대한 선전 및 정보수집을 위해 광복군의 협조를 필요로 했다.
 

광복군은 중국측과 협의를 거친 후 1943년 6월 한영군사협정을 체결하고, 8월 한지성(韓志城) 대장 등 8명을 선발하여 인도버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에 참여했다. 한편 광복군이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미국과의 합동작전이었다.
 

1945년 3월 15일 제6징모분처 주임 김학규는 쿤밍[昆明]의 미군 제14항공대 사령관이며 미국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O.S.S.)의 최고책임자인 센놀트(Claire L. Chennault)와 협의, 공동작전을 위한 6개항에 합의했다.
 

O.S.S.에서는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 편입된 학생들을 중심으로 특수공작교육을 실시, 이들을 국내에 투입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45년 4월부터 이들은 중국의 시안과 푸양에서 훈련에 들어갔으나, 곧이은 일제의 항복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역사적 의의]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 만주지방의 동북인민군과 함께 마지막까지 항일전을 전개한 독립군이었으나, 이들은 귀국 후 해방정국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못했으며, 대한민국 창군과정에서도 만주사관학교와 일본사관학교 출신들에 밀려 국군의 중심역이 되지 못했다.
 

이는 당시 미군정이 광복군 계열을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며 정치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또한 군사기술상으로도 미숙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광복군 출신으로서는 김홍일·최덕신(崔德信)·김신(金信)·안춘생(安椿生) ·송호성(宋虎聲) 등만이 6·25 전쟁 이후까지 국군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을 뿐이다.
 

출처: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사입력: 2007/05/14 [23:25]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옳습니다 김기현 08/08/22 [16:55] 수정 삭제
  우리나라사람들은 언제 이 런일들을 바로잡을지 모르겠습니다. 학자들, 정치인들ㅇ, 종교인들 모두 정신이 없어요...안중근 장군을 의사로 불러 독운동의 실상을 감추고 이제는 광복 63년이 아닌 건국 60년이랍니다. 일제의 만행을 어떻게 한국인이 잊을 수 있습니까? 용서하라고요? 용서할께 따로있어요..하나님도 용서하지 않고 심판하시는데 기독교인들이 개독교 소리 듣는 거예요..목사들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 소리를 해야 하는데 지금 정신없는 한국 큰일입니다. 이런소리집어치우고 조용히 기도하라구요? 기도하면 실천해야죠...행함이 없는 믿음은 행할 수 없는 믿음은 그 사탄이거든요? 배고파 울며 기도하면 먹을 힘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이라도 일제잔재 정치, 교육, 기업, 공무원, 경찰, 군대에서 일제의 독버섯들을 깨끗이 없애야 합니다. 바이러스 클리닝처럼요...청산청산 하는데 국민들이 못알아 들어요, 한자교육 물건너간지 오래되서 깨끗이 없애라고 해야 좀 알아 들으려나?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