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성모 마리아 계시와 12인 정천동맹
<안중근 대학> 길원 남태욱 교수의 대한국인 안증근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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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가 노령 북간도에서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특히 역점을 두고 활동한 지역은 엥치우(煙秋연추),수찬(水淸수청),하바로프스크, 소완구니(小王領소왕령) 시무와루리 아즈미 시즈미 등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성과는 좀처럼 예전같이 가시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1908년 늦가을 쌀쌀한 날씨, 한해가 저물어가는 어느날 밤 안의사가 꿈을 꾸었는데, 어떤꿈인고 하니---

"안중근이 진남포 자기집 방안에 앉아 있는데 홀연 큰 무지개가 떠오르더니 그 한 끝이 머리위로 내려와 닿고 찬란한 빛이 방안 가득히 차는가 싶더니 성모 마리아의 거룩한 모습이 무지개 뒤편에서 떠 올랐습니다. 중근이 너무나 황송하여 머리를 조아리자 성모님께서 가까이 다가와 성서 한권을 손에 건네주며 무슨 말인가를 해주시더니 사라져 가셨습니다."

꿈을 꾸고 나서 그 꿈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으니, 필시 성모님께서 몸소 그 거룩한 성서를 내 손에 쥐어 주신 것은 필시 이 손을 귀하게 쓰라는 뜻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 이렇게 주저 앉아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이 바로 거사를 행동에 옮길 때다. 그를 위해 내가 사용할 것은 머리도 아니고 입도 아니고 발도 아니다. 바로 이 양 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급히 행장을 꾸려 엥치우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엥치우 인근 작은 마을 카리(下里하리)에 11명의 동지를 불러 모았습니다.
여기서 안의사는 결연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전후(戰後)에 전혀 아무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요. 뿐만 아니라, 만일 특별한 단체가 없으면 어떤 일이고 간에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려울 것인즉,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서를 같이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소"하고는 모인 사람들의 표정을 주욱 훑어 보았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면면에서는 한결같이 장한 대한남아의 결연한 기개가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윽고 열두사람이 각자 도끼로 자신의 왼손 무명지(새끼 손가락 옆에것)를 자르고, 그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크게 대한독립이라 썼습니다.(한자로 태극기 우상에 大, 좌상에 韓,우하에 獨, 좌하에 立)쓰기를 마치고, 대한독립 만세를 일제히 삼창하고는 하늘과 땅에 국권회복과 동양평화 사수를 맹세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1909년2월 7일정천동맹(正天同盟)의 결의입니다.

이때의 단지혈맹(斷指血盟)동지는 안응칠 자신을 비롯, 김기룡(金基龍,29세, 이발사, 평안도 경무관을 지낸적 있음), 강기순(姜起順, 39세,의병), 정원식(鄭元植, 29세, 의병),박봉석(朴鳳錫, 31세, 농부), 류치홍(劉致弘, 39세, 농업), 조순응(趙順應, 24세, 농부 의병), 황길병(黃吉炳,24세,농업), 백남규(白南奎,26세,농업), 김해춘(金海春,24세, 사냥꾼의병), 김천화(金千華,25세,노동자 의병),강두찬 (姜斗鑽26세,노동자) 등이었습니다.

안중근이 왜 안응칠이냐, 그럼 안중근은 별명이고 본명은 안응칠이란 말인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사실 안의사께서 여순 감옥 옥중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쓰셨는데 그 자서전 제목도"安應七 歷史(안응칠역사)"라고 되어 있고, 재판당시 공판기록에도 "피고 안응칠"로 되어 있어서 당연히 생기는 의문일 것입니다.

그건 이렇습니다.
안의사의 이름(본명)은 중근입니다. 왜 중근이라 지었나 하면 태어 나서 노는 품새를 보니, 성질이다소 가볍고 급한 편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인수)께서 무거울 중자(重) 뿌리 근자(根)로 이름을 지어 주고, 이름처럼 무게있고 뿌리의식이 확실한 사람이 되어라고 축원을 했던 것입니다. 마침 안의사의 배와 가슴에 일곱개의 검은 점이 있어 자(字)를 "應七" 이라고 해서 어릴때는 응칠이 응칠이 하고 불렀습니다.
안의사가 장성해서 공식 이름을 중근으로 사용했지만, 어느날 도인의 래방을 받고 북간도 연해주 등지로 떠날 결심을 세우면서 이름을 아해때 막 쓰던 응칠로 쓰겠노라, 국권이 회복될때 까지는 중근이란 이름을 쓰지 않겠노라고 결심을 하신 것이 올시다.
진남포에서 두개의 학교를 세워 영재를 모아 교육하던 중, 만난 그 도인말입니다.
의사께서는 "교육으로는 백년지계는 가능하되 당장 숨넘어가는 나라를 구할 수는 없다. 우리동포가 많이 살고 있는 북간도와 연해주지방에 나가 무력을 배양해 일제를 몰아내자. 국권회복때 까지 중근이란 이름대신 운명적인 이름 응칠이란 아명으로만 행세하리라"고 결심을 세우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중근의 회복은 국권의 회복을 의미할 정도로 비장한 결심을 이름에다 부여하신 겁니다.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외세에 의존적이고 남북한이 분단된 상황에서, 의사께서 하신 말씀, "국권회복 대한독립이 달성되기 전에는 시신 조차도 조국에 묻지 말라. 우선 하르빈공원에다 놔 두었다가 그때에 가서 시신을 조국으로 반장해다오. 그때엔 천국에서 나도 함께 만세를 부르리라"는 천추지 유언을 뇌리에 새기면서, 하르빈공원도 아닌 여순감옥에 감금되어 계신 의사의 유해 앞에 후손으로서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금치 못하며 필자 오늘 여기서 필을 놓습니다.
<남태욱 = 영남대교수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지도위원>

기사입력: 2010/01/01 [21:20]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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