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얼룩진 항일 태극기 사연 찾습니다
경남 김해 조재범씨, "아버지가 안중근 태극기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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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장기를 변형해서 만든 태극기 곳곳에 피자욱 선명    © 단지12 닷컴
 
일장기를 놓고 그 위에 먹물로 태극 4괘를 그리고 먹물로 태극를 만든 일제시대 태극기, 곳곳에 피자욱이 선명하다. 태극기 뒷면엔 '안응칠'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다.

피묻는 태극기 소장자인 경남 김해 조재범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 태극기를 보여주면서 '안중근 태극기'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조재범씨의 부친은 한국 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부상을 입고 제대한 보훈대상자로 7년전 타계했다.

조씨는 84년 대학 1학년때 아버지로 부터 이 태극기가 '안중근 태극기'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당시 조씨는 태극기 뒷면에 부착돼 있는 '안응칠'이라는 이름이 안중근 장군의 또 다른 이름인지는 몰랐다고 말한다.

태극기의 보관상태는 오랜 세월을 증명하고 있고 이미 한쪽은 천 조각이 부식될 정도로 낡았다.

일장기를 태극기로 변형했고, 태극기 곳곳에 피자욱이 선명한 것으로 추정해 분명 일제시대 범상치 않는 역사를 간직한 태극기 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 태극기가 안중근 장군의 투쟁과 연관이 있다는 점을 입중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다만 안중근 장군의 또 다른 이름인 '안응칠' 이름표가 붙어있다는 것이다.

이 피묻는 태극기는 무슨 사연으로 안응칠이라는 안중근 장군의 또 다른 이름이 붙어있을까?


▲   피자욱이 선명한 이 태극기는 일장기을 변형해 제작한 것이다. 피의 주인공은 누굴까?  © 단지12 닷컴
조씨는 아버지 생전에 어떻게 이 태극기를 소장하게 된 것인지 그 경위를 물어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만 생존해 계신 어머니는 아버지가 이 태극기를 안씨 문중에서 구한 것이라고 만했다.
 
안중근 장군 하얼빈 작전 100주년을 맞이해 곳곳에서 안중근 관련 행사들이 주를 이루면서 조씨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피묻은 태극기를 다시 꺼냈다. 그 사연을 공증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어떻게 이 태극기를 구했고, 무슨 연고로 안중근 태극기라고 말했을까? 실제 이 태극기는 어디에서 사용된 것이기에 피자욱이 선명할까? 이 피의 주인공은 도데체 누굴까?
 
태극기를 소장하고 있는 조재범씨는 안중근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 측에 피묻는 태극기의 사연을 전달했고, 청년아카데미 정광일 대표가 30일 경남 창원에서 조씨와 태극기를 만났다.
 
▲  태극기 뒷면에 안중근 장군의 또 다른 이름 안응칠이라는 이름표가 부착돼 있다.   © 단지12 닷컴
정광일 대표는 일장기를 변형해 만든 태극기가 피자욱이 선명하다는 것은 일제시대 항일운동가가 소지한 태극기가 분명하지만 이 태극기를 안중근 장군과 연결하는 것은 조심스럽다는 입장이다. 다만 태극기 뒷면에 부착된 안응칠이라는 이름은 안중근 장군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랫동안 태극기를 소장한 분이 이 태극기를 안중근 태극기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는 견해를 밝혔다.
 
안중근 장군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사살 하기 전에 연해주에서 의병 항일투쟁을 전개했고, 특히 1908년 2월에는 태극기에 12동지들이 왼쪽 약지 손가락을 절단하고 괘없는 태극기에 한문으로 '대한독립'이란 혈서를 쓴 기록이 있어 안중근 장군이 태극기에 대한 각별한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면서 이 태극기가 안중근 장군이 소장한 것이라고 단정짓기 위해서는 고증이 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태극기에 피자욱이 선명하다는 점과 일제기를 갖고 만들었다는 점에서 분명 이 태극기 소장자는 항일투쟁의 과정을 거쳤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분석했다.
 
아버지로 부터 가보처럼 소중하게 이 태극기를 물럽잗았다는 조 씨는 최근 안중근 장군 후손들이 안중근 유해찾기 일환으로 DNA 검사용 체혈을 했다는 뉴스를 보았다면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태극기에 묻어있는 피자욱과 DNA 비교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욕심도 갖고 있다.
 
조씨를 만나 태극기 보존상태 등을 확인한 안중근청년아카데미는 조씨에게 태극기 역사 등 태극기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전문가에게 우선적으로 자문을 받는 것이 좋겠다면서 안중근 장군과의 관련성 유무를 떠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태극기인 만큼 보존상태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재범은 김해와 창원에서 축구인으로 통한다. 유소년 축구교실을 갖고 학생들에게 축구를 지도하고 있다. 내년 5월에는 김해에서 '전국 중등부 축구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조씨의 피 묻는 태극기 사연은 지난 27일자 경남일보에 처음으로 보도된바 있다. 경남일보 보도 이후 조씨는 축구인 선후배들로 부터 훌륭한 아버님 두셨다는 덕담을 자주 듣는다고.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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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0/30 [22:54]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태극기 등장 09/11/01 [13:51] 수정 삭제
  판소리 독립 열사가 40년대 필사본 발견
| 기사입력 2009-11-01 08:30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월북한 판소리 명창 고(故) 박동실(1897~1968)은 일제 강점기에 안중근,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다룬 창작 판소리 '열사가(烈士歌)'를 만들었다.

중앙대 창작음악학과 노동은 교수는 박동실이 만든 안중근ㆍ유관순ㆍ윤봉길ㆍ이준 등 4명의 '열사가' 판소리 필사본을 1일 공개했다.

이 필사본은 소리꾼인 고(故) 서동순(1910-1982)이 광복 무렵에 박동실로부터 열사가를 배우면서 노트에 직접 가사를 적은 것으로 '박동실 작곡, 서동순 씀'이라고 적혀 있다. 군데군데 가사를 일부 고친 흔적도 남아 있다.



필사본은 A4용지 절반 크기의 노트에 잉크로 적었으며 모두 40쪽 분량이다.

이 가운데 '안중근 열사가'는 의거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안 의사가 순국하기 전 감옥에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나는 모습을 비통하게 그려냈다.

"뜻밖에 어떤 사람이 권총을 손에 들고 번개같이 달려들어, 기세는 추상같고 심산맹호 성낸 듯 이등 앞으로 우루루루. 이등을 겨눠 쾅, 쾅, 또다시 쾅, 쾅. (중략) 감추었던 태극기를 번듯 내여 휘두르며 '나는 원수를 갚었다. 이천만 동포들 쇠사슬에 얼궈놓은 우리 원수 이등박문, 내 손으로 죽였오. 대한독립 만세' 우렁찬 소리로 외치니 할빈역이 진동"

노 교수는 "민족주의자였던 박동실은 1930년대말 고향인 전남 담양에 초당을 짓고 박석기라는 거문고 명인과 함께 김소희, 박규희, 한승호 등 제자들을 가르쳤다"며 "이때 판소리 다섯 마당을 가르치는 것 외에도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민족영웅을 소재로 한 판소리를 만들어 비밀리에 전수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판소리 공연도 일본어로 해야 했던 상황이라 '안중근 열사가' 등은 실제로 공연되지는 않고 전승만 됐을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광복을 맞았지만 박동실이 한국전쟁 때 월북했기 때문에 '열사가'는 널리 퍼질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이후 월북 예술가들의 작품이 해금되자 1990년대에 음반이 녹음되기도 했지만,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노동은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음악인들이 애국지사들을 그려 민족정기를 확립하려 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면서도 "박동실 선생이 월북하고 나서 '열사가'가 묻혀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노래들이 조명받지 못한 것이 많은데 이런 노래가 많이 알려져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사진 설명 = '안중근 열사가' 필사본, 박동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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