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날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
이등박문 사살한 이유 15항목에 " 군대를 해산한 죄" 포함
 
남태욱 교수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오늘 10월 1일은 대한민국 건군 61주년 국군의 날이다. 그리고 이달 10월 26일은 안중근 장군 이등박문 사살 의거 100주년 기념일이다. 
이에 우리 국군의 임무의 막중함을 재삼 간절히 일깨워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심중의 충정을 써 올리는 바입니다.  
 
 
1895년 10월 8일 밤, 우리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대한제국 고종황제비 민비께서, 제국주의 침략자 이등박문의 사주를 받고  남의 나라 구중 궁궐 옥호루에 무단 난입한 조폭(낭인)들 손에 무참히 칼로 찔리고 살해당한 이날을 꿈엔들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명성황후는 직접 미우라의 지시를 받은 일본 낭인들에 의해 경복궁의 별관 건천궁 옥호루(玉壺樓)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일제는 1895년 이날 조선 궁궐 옥호루에 잡배(깡패들) 수십명을 난입시켜 명성황후를 능욕후 살해했다.
 
김원웅(전 국회의원.국회통일외교통상부 위원장)은, 신하들에게조차 얼굴을 보이지 않는 지엄하신 남의 나라 왕비이자 국모를 발가벗기고 온갖 능욕을 자행(국부검사와 강간)하고 산 채로 석유불로 태워 죽이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고 당시의 상황을 토로했다.
이 명성황후 살해사건은 세계인류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너무나 처참하고도  치욕적인 만행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우리 국사에 을미사변으로 기록된 사건의 실상이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다음날 타고 남은 뼈조각과 숯덩어리가 발견되어 이것이 명성황후 시신임이 알려졌으며, 당시 조선의 훈련대(군대) 참위 윤석우가 재와 모래에 뒤섞인 황후의 시신을 보자기에 싸서 멀리 떨어진 오은각 서봉(西峰)밑에다 묻어두었다가 다음 다음해1897년에 장사지냈다. 
 
이 소식을 접한 대한의 건아들은 이때부터 이미 형해화 되어 있는 조선 군대를 대신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설 의병을 조직하여 일제를 응징할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무심한 역사의 수레바퀴는 8년을 더 돌아 드디어 일본제국주의자 이등박문이 조선영토를 가장 먼저 침탈 한 곳이 독도다.
1905년 2월22일 시네마현고시 제40호에 의한 독도강제편입 사건이 그것이다.
 
이어서 1907년 7월20일에는 이등박문에 의해 고종황제가 강제퇴위되고, 마침내 며칠뒤 8월1일에 조선의 훈련원 즉 군대가 강제해산되었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그의 자서전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때 (1907년) 이등박문이 한국에 와서 7조약을 강제로 맺고, 고종을 폐하고, 병정들을 해산시키자, 2천만 인민이 일제히 분발하여 벌떼처럼 일어나 삼천리 강산에 대포소리가 펑펑 하고 크게 울렸다.
 
(이른바 정미7조약이란 1907년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위해 강행한 마지막 조치이다.
헤이그밀사사건을 트집잡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일본은 허울만 남은 대한 제국을 말살하기 위하여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행정권, 일본관리의 임명 등 7개항의 조약안을 제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이완용과 이등박문사이에 조인되었다.
 
이리하여 일본은 국내 통치권 즉 행정실권을 장악, 한국인 대신 밑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고, 경찰권을 위임받아, 군대를 해산시키고, 언론을 탄압하여 1910년 8월22일 마침내 대한제국의 국체를 말소시키고 한일 합방을 성사시켰다. 외교사에는 한일신협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일합방조약 또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 데라우찌 마사다께(寺內正毅)사이에조인되었으니, 재수없고 나쁜 일은 이완용이 도맡아서 했다. 이완용은 1920년 일본의 후작지위도 하사받고 1926년에 죽을때까지 일본의 개노릇을 했다)
 
대포소리가 삼천리를 진동하자 안의사는, 드디어 때가 왔다, 평화는 끝이 났다, 이제 남은것은 오로지 적과의 목숨 건 전투뿐이라고 판단, 급급히 행장을 차려가지고 가족들과 이별하고 북간도를 향하여 출발했으니 그 해가 바로 1907년이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이때부터 두만강역과 중국령 북간도에서 풍찬노숙하며 외로히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 정규군과 교전을 하다가 마침내, 작전을 비밀리에 전개하여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박문을 중국 하얼빈 역에서 사살하는 거사를 성공시킨 것이다.  이날이 1909년 10월 26일이다.

이등박문을 사살하고 난뒤 안중근 의사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또 재판을 받는 도중 나는 이토를 죽인것에 대해 잘못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는 이러하다"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정권을 강제로 뺏은 죄요.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뺏은 죄요.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교육을 방해한 죄요.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퍼뜨린 죄요.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엔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아! 안중근 장군이 아니었던들 우리 겨레가 어떻게 일제에 의한 우리 국모 명성황후의 참혹한 살해의 울분을 가슴에다 고스란히 담고 이를 삭이며 살아갈 수 있었으랴!
아마도 우리네 선조들 가슴이 터지고 말았을 것이 아니었겠나!
 
아! 안중근 장군이 아니었던들 우리 조국의 자주국방력을 강제박탈 당한 울분을 누구에게 어떻게 하소연할 수 있었겠는가! 
 
안중근 장군이 아니었던들 국제 평화의 소중함을 우리 후손들이 어떻게 다 깨달을 수 있었으랴!
 
안중근 장군이 아니었던들 한 나라의 자주독립이 얼마나 절실히 요구되는지를 세상에 어떻게 알릴수 있었으랴!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조선은 일본에 의해 한일합방이라는 미명하에 강제병탄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35년간 우리 선조들은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식민지 노예생활을 강요받았다.
 
이 모든 것이 나라의 자주 국방력을 상실한 결과다.  조선의 군대가 해산되고 난 뒤 우리 조국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뒤 찾아온 외세에 의한 조국 해방, 1945년 8.15 광복절!
1948년 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그리고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
 
오늘 10월1일은 그로부터 61돌을 맞는 이른바 건군 61주년 국군의 날이다.  
 
대한민국 국군이 없었던들 6.25사변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대한을 지켜낼 수 있었겠는가?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7월27일까지 전쟁의 참상을, 우리 고교 동기생들은 환갑기념 전쟁기념관 견학을 통해서, 전쟁 당시의 현장에서 우리가 몸소 직접 체험하듯이 그 참상을 생생히 알아볼 수 있었다.
 
차제에 대한민국 국군에 꼭 당부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아니 차라리 자유 대한국민들의 피맺힌 절규라고 해야겠다.
 
첫째, 방심하지 말라.
 
구한말 정치의 혼란을 틈타 구중궁월에 일본 낭인들이 난입하여 국모를 능욕 살해하고 마침내 조선군대가 해산되고 모든 것을 잃은 비극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둘째, 정신무장을 게을리하지 말라.
 
사회가 돈과 섹스에 썩어가더라도 군대는 조국수호의 깨끗한 상무정신을 잃지 않기 바란다.
 
셋째, 멸사봉공의 자세를 견지하라.
 
유구한 역사 동안에 조국을 위기에서 건져낸 참으로 장하신 구국의 영웅들을 한 시라도 잊지말라. 그들의 멸사봉공의 자세를!  
 
대한민국 국군이여 그대가 있어 참으로 든든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안심됩니다. 자유 대한국군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009년 10월 1일 길원 남태욱.

기사입력: 2009/10/01 [09:59]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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