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하얼빈에서의 열하루
거사 직후 10월 27일 안중근 가족 하얼빈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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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서 11일간 머무르게 된다. 이등박문을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 1909년 10월 22일부터 이등박문 사살 후 체포돼 같은 해 11월 1일 대련의 여순감옥으로 이송되기까지다.
 
1909년 10월 2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을 떠난 우편 열차는 22일 저녁 9시에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 가운데 조선의 애국청년 셋이 있었으니 바로 안중근, 우덕순, 류동하였다. 안중근 일행은 포장마차를 타고 레스나야가 28번지(현재의 도리구 삼림가)에 있는 하얼빈 한민회(韓民會) 회장 김성백의 집을 찾아가서 그곳에 유숙했다.     
 

김성백은 하얼빈의 도리 조선족 중심소학교의 설립자이며 초대 교장을 지냈다. 도리구 경위 4도가에 위치한 도리 조선족 중심소학교는 1908년 8월 한민회 286명과 초대 교장 김성백이 러시아에서 약을 팔아서 모은 돈 350원으로 ‘동흥학교’란 이름으로 설립됐다. 이 학교는 안 의사가 10월 22일부터 거사 직전까지 머물며 거사를 계획했던 역사적인 곳이다.
도리 조선족 중심소학교는 지난 4월 30일 10시 ‘민족얼을 새겨 한 세기’라는 주제로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학예회를 열었는데, 6학년-한국군의 노래와 시, 2학년-장부가와 시, 1학년-민요타령, 4학년-세계 위인들의 안중근 평가, 3학년-노래, 춤, 시낭송, 6학년-선구자, 1학년-안중근의 명언과 경구, 5학년-연극(민족의 별 안중근)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특히 이 행사는 도리 소학교 자체 예산으로 치러졌고, 백미옥 교장은 10월에도 안중근 의사 관련 행사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 민간자치제 조직 하얼빈 한민회와 김성백 회장
 
하얼빈 한민회(韓民會)는 하얼빈시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부딪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민간자치제 조직으로 1909년 7월 27일 조선인 70여 명이 모여 회의를 열고 한민회 성립을 선포했으며, 당시 32세의 김성백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김성백은 청부업자로서 동청철도건설에 참여했는데, 러시아 통역까지 겸하고 있어 러시아 관헌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하얼빈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권익을 대표하고 요구와 고난을 해결해 주기에 힘썼다. 동포들의 거처와 직업 알선뿐 아니라 조선인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서 가장 많은 투자를 했고, 회원들과 더불어 힘과 지혜를 모아 조선인 학교 ‘동흥학교(東興學校)’를 세운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사망했을 때 일정한 묘지가 없어 임시로 묻은 곳이 자주 침수되고, 개들이 무덤을 파헤쳐 백골이 노출되기까지 하는 일이 있었는데, 김성백은 러시아 관헌으로부터 토지를 빌려 조선인 묘지를 세움으로써 동포들의 묘지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1909년 10월 22일 민족영웅 안중근 의사 일행은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처단하려고 하얼빈에 도착했고, 김성백의 집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류동하의 두 살 아래 여동생 류안나가 김성백의 넷째 동생 김성기(러시아 명 알렉산드르)와 약혼한 사이였다.
김성백의 셋째 동생 김성엽은 수분하에 있는 류동하의 부친 류경집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질병 치료 중이었다. 그러니 류동하와 김성백은 친한 사돈지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김성백은 류경집의 집에서 안중근을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안중근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을 뿐 아니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할 때까지 거사 준비 자금을 대주는 등 많은 도움을 줬다.
▲ 안중근 의사 거시 직후 하얼빈에 도착한 두 아들과 부인 김마리아 여사.     © 단지12 닷컴
수분하 중국세관의 서기로 일하고 있던 정대호는 조선에 가서 가족을 데리고 오는 길에 자기 가족도 같이 데려와 달라는 안중근의 부탁을 받고, 자기 식구 6명 외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와 2살, 4살 된 두 아들을 데리고 하얼빈에 도착해 김성백의 집에 유숙했다.
그러나 이미 10월 27일, 바로 안중근이 거사한 이튿날로서 안 의사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여서 서로 만나볼 수 없었다. 정대호는 곧 체포돼 안중근과 같이 여순감옥으로 압송되고, 정대호 세 식구와 안중근의 처자 세 식구는 11월 22일 하얼빈을 떠나 수분하에 갈 때까지 줄곧 김성백의 집에 머물면서 도움을 받았다. 김성백의 집은 “언제나 사람이 모여드는 집”이라고 했다. 그만큼 그의 인품이 두터웠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동지였던 우덕순이 해방 후 서울에 돌아와서 쓴 회고록에서 김성백을 “우리와 같이 한국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지사”라고 했다.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 일본 외무대신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 하얼빈의 한민회는 ‘경상적으로 반일사상을 선동하는 중심’이라 했고, 회장 김성백은 ‘반일파 한인들의 수령’이라고 했다. 이로 보아 김성백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하얼빈역 최종 결정과 안 의사의 격동가
 
1909년 10월 23일 안중근 의사 일행은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이날 중문판 ‘원동보’ 신문에 “전 조선통감 이또 히로부미가 동청철도 총국의 특별열차편으로 25일 관성자역을 출발해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를 만나려고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짧은 기사가 실렸다.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 등 3명은 하얼빈역의 환경을 둘러보고 행동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한편, 하얼빈 역에서 거사가 어려울 경우를 대비해 다음 날 채가구(蔡家溝)역으로 갔다. 하얼빈역은 경계가 삼엄할 것을 염려해 하얼빈에서 가장 가까운 열차 교차점인 채가구에 가서 거사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세 사람이 9시발 관성자행 열차를 타고 갔는데 그날 밤 안중근은 열차가 채가구를 지나 관성자로 가는 것을 보았고, 26일 아침 6시 이곳에 도착한다는 확실한 정보를 입수했다. 우덕순은 초기에 독립협회 등 애국계몽단체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러시아로 건너가 동지들의 재정지원을 받아 학교를 설립하며 청년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전 북간도관리사(北間島管理使)를 지낸 이범윤(李範允)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도 연락을 취해 의병을 조직, 항일전을 준비했다.
1908년 여름에는 안중근과 함께 함경도 경흥과 회령 지방의 일본 군영을 습격해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고, 연추(煙秋)에서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할 때 함께 결사보국을 맹세했다. 이등박문을 확실히 처단하기 위해 그는 안중근과 떨어져 채가구역에서 거사를 준비했다. 이등박문이 처단된 후 그도 검거돼 안중근과 함께 공범자로 지목돼 러시아 헌병대로 끌려가 일본군에 인도됐으며, 여순감옥에서 함께 재판을 받아 1910년 2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0월 25일 안중근 일행은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안중근은 이등박문이 채가구역에서 내리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아침 6시라면 어두움이 가시지 않을 시간인데 저격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우덕순은 채가구에 남고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거사하기로 했다. 오늘날 채가구역은 폐쇄돼 쓸쓸한 적막감만 나돌고 있다. 안중근은 채가구에서 오후 2시 북행열차를 타고 다시 하얼빈으로 돌아와 역사적인 10월 26일의 아침을 기다리면서 ‘장부 처세가’를 우리에게 남겼으니 우리 후손들에게 남긴 안 의사의 피맺힌 격동가였다.
 
<장부처세가>

장부가 세상에 처함에,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웅시(雄視)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차가우나, 장사의 뜻은 뜨겁다.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등박문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고연(固然)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 지어라.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 대한동포이로다.
 
<안중근 자서전에서>
 
글쓴이 = 윤종준 성남문화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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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9/28 [07:18]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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