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가 모두 없는 고독한 영웅 '안중근 3형제'
셋째 안공근 1940년 실종, 둘째 안정근 1949년 중국 상해서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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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의 둘째 동생 안정근. 연해주 시절 러시아 국적을 취득해 러시아 군관이 됐다. 서울에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단지12 닷컴

안중근 장군 하얼빈 작전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들이 준비되고 있다.
안중근 장군은 민족의 영웅으로 민족정기의 표상으로 국민들 가슴속에 각인된지 오래다. 그러나 안중근 유가족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 안중근 시대 이후 그의 유가족은 사실상 몰락에 가깝다.한국 독립운동사에 안중근 가족 만큼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가문은 없다.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 진사는 중근, 정군, 공근과 외동딸 성녀를 두었다.
해방 후 안중근 유가족들은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남한, 북한, 해외로 흩어졌다.
 
안중근 직계후손은 미국으로, 정군 직계는 남한, 공근 직계는 북한에서 산다. 안중근 100년, 남과 북 해외로 흩어진 그의 후손들의 만남은 불가능할까?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하얼빈 작전 이후 안중근 가족은 조선을 떠나 연해주로 이주했고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 이후 다시 연해주에서 상해로 이주했다. 상해에서 안중근 동생 정근과 공근은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의 최측근으로 임정을 이끌었다.
 
그러나 안공근은 1940년 중국에서 의문의 실종으로 임정무대에서 사라졌고, 둘째 정근은 해방이후 귀국하지 않고 1949년 상해에서 병사했다.
따라서 안중근 장군 유해와 마찬가지로 이들 공근 정근 유해 또한 어디있는지 모른다. 3형제 모두 묘지가 없는 고독한 영웅의 3형제 인셈이다. 
  
<안정근>
 
안정근은 3‧1운동 이전부터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다. 그는 1914년 ‘권업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동생 안공근과 함께 러시아에 귀화했지만, 1915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노령(露領) 총감을 맡고 있었다. 1918년 11월 중국의 길림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무오독립선언문’의 발표에도 공동으로 참여했다. 3‧1운동 후 1919년 10월 경 그는 가족들과 함께 샹하이로 이주했다. 이들의 이주는 안중근의 맏아들 분도가 독살된 이후 안전한 활동근거지를 찾으려던 자신들의 소망과, 이미 샹하이에 집결해 있던 백범 김구(1876-1949)나 도산 안창호 등의 초청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샹하이에서 그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참여하여 백범 김구와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이후에는 여기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했다. 김구와 함께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그 후 간도와 연해주 지방을 넘나들면서 샹하이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에 진력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대한적십자회 부회장, <독립신문>의 발행인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간도 교민단(僑民團) 설립, 청산리 전투 보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1925년경부터 신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었고, 1939년 이후에는 중국 각지를 옮겨 다니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샹하이에서 1949년에 죽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안공근>
 
안중근의 두 번째 동생은 안공근은 원래 서울교육대학교의 전신인 한성사범학교를 마치고 진남포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는 안중근 의거를 계기로 하여 교사로서의 생활을 접고, 중형 안정근 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살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뻬쩨르부르크 및 모스크바에 머물며 러시아어를 연구했다.
 

그는 1919년 임시정부 안창호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특사로 임명되어 샹하이로 오게 되었다. 샹하이에 도착한 다음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외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외교관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 등을 상대로 하여 독립자금의 확보를 위해 활동한 바 있었다. 안공근은 샹하이로 귀임한 1925년 이후부터 모친 조마리아와 안중근의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실질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는 1925년 샹하이로 귀환한 직후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이 서거했을 때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적 통일’을 강조했던 그의 유언을 필기한 바 있다. 이처럼 그는 임시정부의 핵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1926년 여운형의 후임으로 샹하이 한인(韓人) 교민단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 상해 임정시절 김구 선생등 요인들과 함께 찍은 안중근의 셋째동생 안공근 사진(뒷줄 왼쪽에서 4번째) 안공근은 1940년 중국에서 실종됐다. 그의 후손들은 북한에서 살고 있다.    © 단지12 닷컴

한독당의 별동대로서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한인애국단’이 김구의 주도로 결성되자 안공근은 그 단장이 되었다. 한인애국단은 이봉창 및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획한 조직이었다. 이 시기 일제의 정보보고서에는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로서 그의 신임이 가장 두텁고 김구가 범한 불법행동은 안공근의 보좌에 의해서 된다”고 평한 바 있었다. 1930년대 그는 이처럼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최측근인으로 활동했다.

안공근은 6개 국어에 능통했다. 그는 샹하이에서 미국 혹은 영국대사관에 통역으로 근무한 바 있었고, 소련 영사관 및 독일 영사관과도 관계를 맺었다.  
 1934년 중국 낙양에 중앙군관학교 분교에 한인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했고, 1936년 김구가 주도해서 결성한 한국국민당에 함께 참여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여전히 임시정부의 핵심요인 가운데 하나였고, 김구 주석의 정보책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7년부터 행방불명이 되던 1940년까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말 중경(重慶) 시절 김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안공근은 중경에서 샹하이 동제대학 출신 의사 유진동(劉振東)의 집을 내왕하면서 지내다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에서 안공근과 경쟁관계에 있던 기호파 계열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  안중근 순국 전에 여순감옥을 찾아 면회한 두 동생  정근과 공근 1910년 3월 10일 여순감옥    © 단지12 닷컴


기사입력: 2009/09/26 [10:44]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john 10/03/17 [10:47] 수정 삭제
  누이동생 안성녀 여사는 광복후 북경에서 아들내외와 큰손녀와 함께 서울로 오셨고 한국전쟁후 부산영도에 정착해 사시다가 현재 부산 용호동 천주교묘소에 안장되어 계십니다. 국립묘지로 이장을 가족들은 원하지만 증인 및 확인불가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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