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일성, 안중근 의사를 가장 존경했다”
삼중스님의 대증언…일본에서 만난 고 안중근 의사
 
김성애
삼중스님의 8.15 광복절은 사연이 깊다.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를 마음 깊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는 투철한 군인이었고, 위대한 사상가였다. 시와 서도를 잘하는 예술가이기도했다. 준수한 외모와 논리 정연한 언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단지한 손, 적마저도 존경심을 자아내게 했던 인품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삼중스님은 안중근 의사와의 만남을 절절한 마음으로 밝혔다.
 
삼중스님은 1984년 일본 동북지역에 있는 센다이에서 열리는 ‘전국 교도소 재소자 교화 전국대회’에 초청되었다. 일본 교화위원들이 참석했다. 세미나에 참석하는 동안 삼중스님은 센다이 근처에 있는 절에 가고 싶었다. 지인의 안내로 ‘대림사(大林寺)’라는 전통 유명사찰을 방문했다. 삼중스님은 그 시골의 조그마한 절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났다. 삼중스님이 절에 참배하려 들어섰을 때, 정문 앞 대웅전 앞뜰에 있는 큰 비석이 눈에 띄었다. 집채만 한 돌비석에 쓰여 진 글을 본 삼중스님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 즉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내용의 한문글씨가 새겨진 돌 비석에는 ‘대한국인 안중근’이라는 이름과 함께 단지한 손바닥 장인이 찍혀 있었다.
 
안 의사 추모비가 일본에?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일본 산골짜기, 조그만 시골 절에 집채만 한 비석에는 안 의사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사찰의 주지를 찾아서 그 내력을 물었습니다. ‘어떤 사유로 대웅전 정문 앞에 안중근 의사의 추모비가 이리 크게 세웠는가?’ 그 추모비를 보는 순간 나는 안중근 의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2만이 넘는 절에는 안중근 의사의 추모비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비문에는 구국의 영웅인 대한의병군 안중근(1879~1910)에 대한 현창문을 센다이현의 지사가 썼습니다.”
 
▲일본인 간수 찌바도오시찌가 일본에 세운 안중근 추모비. 오른쪽이  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센다이현의 지사는 우리나라의 도지사와 같다. 지사는 1981년 3월 26일 한국의 발전을 기원하며 1909년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의 축전을 썼다. 안중근 의사의 필적을 소장했던 찌바도오시찌의 유족들이 동경한국연구원(東京韓國硏究院)을 통하여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를 기증하였다.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안중근 의사의 친필은 현재 남산 안중근 의사기념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 시골 절의 한 신도는 안 의사의 유패를 모셔놓고 매일 향을 피워 명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불교신자는 1909년 바로 중국 뤼순감옥에서 안 의사를 지켰던 김옥의 간수였습니다. 일본군 헌병 상사였습니다. 그는 안 의사의 간수를 자청했습니다. 간수가 된 배경도 흥미로웠습니다. 1909년 10월 29일 안 의사는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처단했습니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는 가슴 아프게 국가원수가 암살당한 대사건이었죠. 우리 입장에서는 민족보전의 열망에 찬 불가항력의 의거였습니다. 헌병 상사의 입장에서는 조선인이 비겁하게 국가원수를 암살했다는 장면에 광분했던 것입니다. 의협심이 아주 대단한 헌병 상사였습니다. 찌바도오시찌는 자원해서 뤼순 형무소 간수가 되었습니다.”
 
헌병 상사 뤼순감옥 자원
 
올해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총으로 처단한지 100주년이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군 형무소에 갇혔다. 일반 형무소가 아니라 혹독하기 그지없는 군 형무소이다. 삼중스님은 40여 년 동안 형무소를 쫒아 다녔던 사람이다. 삼중스님은 그 역사적인 자리를 눈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어떠한 기록에도 적혀 있지 않은 숨겨진 진실을 찾을 수가 있었다. 이러한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은 교도소의 분위기를 꿰뚫고 있는 삼중스님이기 때문이다.
 
“의협심이 대단한 찌바도오시찌는 자원해서 안 의사를 지키는 간수가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말에는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기록에도 있지 않는 이야기를 각색을 했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나만큼 교도소의 분위기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찌바도오시찌는 안 의사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었을 겁니다. 서슬이 시퍼런 27살 찌바도오시찌 헌병 상사는 세상에 무서울 게 없었을 겁니다. 자신의 눈에는 안 의사가 비겁한 암살자로만 보였을 겁니다. 늙은 노정객 수상을 암살했다는데 광분했을 겁니다. ‘이 비겁한 놈을 내가 직결해서 쏴 죽여 버리겠다!’는 서슬 퍼런 호통에 저라도 혼절을 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과 완전히 다른 무서운 일제 강점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안 의사는 들이대는 총부리 앞에서도 의연하게 맞섰습니다. 안 의사가 무서운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고 난 후 만세 삼창을 외쳤던 사내중의 사내였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이미 내던졌던 사람이니 의연하게 웃고 있었겠죠.”
 
▲ 찌바도오시찌 일본인 헌병간수.  그는 사망헀다.  ©브레이크뉴스
안중근 의사는 서슬 시퍼런 총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쏘고 싶다면 쏴라. 그러나 나는 비겁한 암살자가 아니다. 나는 동양평화를 위해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을 뿐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주권을 완전 박탈했다. 대륙침공으로 동양의 평화를 파괴하고 있다. 침략의 원흉이다. 나는 대한민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침략국의 적장을 사살한 것이다. 나의 목적은 전쟁에 미친 늙은이를 사살해서 동양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일본 자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언젠가는 일본인들도 알게 될 것이다.’
 
헌병 간수는 무릎 꿇다
 
“27살 당당했던 찌바도오시찌 헌병간수는 무릎을 꿇습니다. 안 의사의 의연한 논리 앞에 고개를 숙인 것입니다. 총으로 직결하려던 생각이 바로 반전된 것이죠. 혈기가 충천한 젊은이는 누구보다도 바로 반전되는 법입니다. 안 의사는 30살이니 찌바도오시찌와는 3살 차이였습니다. 안 의사가 형님 벌이었지만 스승으로 존경하게 된 것입니다. 의사로서 동양평화의 의인이라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변해도 너무나 확 변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총살한 것으로만 위대한 인물이라는 평가에서 한층 더 뛰어 넘어야 합니다. 또 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다시 한 번 해석해야 합니다. 역사에 기록되어져야 할 사건이 뤼순 감옥에서 일어났습니다.”
 
사실상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사건은 역사적인 대사건이다. 중국의 4억에 가까운 인구에서도 그리하지 못했다. 그 보다 더 위대한 사건의 흔적은 감옥을 다녀 본 삼중스님만이 찾을 수가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이 확정된 상황에서 적을 감동시켰다. 적이 안중근 의사에게 감동한 증거물이 있다. 감옥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증거가 아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있었다.
 
감옥에서 붓글씨 허락?
 
“세계 어느 나라 형무소에서도 사형수에게 붓글씨를 쓰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볼펜 글씨만을 허락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안 의사는 사형집행을 대기한 상황에서 역사적인 감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형수가 감방 안에서 붓글씨를 썼습니다. 경술년 이월 삼월은 1910년 2월과 3월입니다. 안 의사는 1910년(경술국치)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사형되었습니다. 사형 집행전인 2달 전, 사실은 1달 전에 붓글씨를 많이 썼습니다. 안 의사의 손바닥의 낙인과 함께 적힌 날짜는 경술 이월, 삼월입니다. 이월보다는 집행 당월인 삼월에 쓴 붓글씨가 더 많았습니다. 이러한 일면을 다른 시각으로 뒤집어본다면 어떠한 상황으로 연결되겠습니까?”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실상 사형이 확정되면 그 순간부터 사형수로 취급된다. 그 전까지는 미결수, 사형이 확정된 안 의사에게 붓글씨가 허락된 것이다. 먹, 화선지. 벼루가 공개적으로 허락이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붓글씨는 200점 정도를 썼다고 적혀있다. 붓글씨는 사형 집행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썼다. 교도소 당국자가 허락 하에 붓글씨를 썼을 것이다. 자국의 수상을 살해한 사형수에게 그런 특권을 준 까닭을 밝혀본다.
“오늘날까지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사형수에게 그리 특권을 준 사례는 없습니다. 안 의사만이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 증거물로 보존되어 있는 붓글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특권은 분명히 누가 도와주어야 허락되었을 것은 뻔한 이야기입니다. 안 의사의 헌병 간수인 찌바도오시찌가 도와주었습니다. 안 의사를 얼마나 존경하였으면 위대한 사상을 남기도록 배려했을까요? 사형수의 자격으로 붓글씨를 200여점이나 썼습니다. 2달 동안 200여점이나 썼다면 하루에 3~4점이나 썼다는 증거입니다.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의 단지한 손바닥 낙인을 찍은 붓글씨는 누구를 주었을까요?”
 
안 의사의 붓글씨는 공식적으로 50여점이 보존되어 있다. 뤼순감옥에서 쓴 붓글씨는 분명히 누군가가 달라는 사람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교도관, 가까이 모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써주었다. 그들은 안 의사를 존경했다는 또 다른 해석이다. 국가 원수를 사살한 사형수를 도와주다가는 바로 자기가 죽을 수도 있는 현실에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간첩으로 수감된 사형수에게 붓글씨를 허락했다면 큰일이다. 그 정도가 넘는 대사건이다.
 
‘국가안위 노심초사’
 
▲ 사진 뒤쪽이 안의사 유해가 묻힌 장소이다.    ©브레이크뉴스
“감옥에서 사형수는 인간으로서 모든 면이 노출됩니다. 그런데 일본 영웅인 국가원수를 저격한 국사범에게 붓글씨를 쓰게 했다는 사실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보아도 안 의사는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위대한 인간 승리입니다. 적을 감동시켰다는 점은 새로운 역사적인 일입니다. 붓글씨 중에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가 있습니다. 사형수 신분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 극한 상황에서도 국가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우고 있었습니다. 그 붓글씨는 누구에게 주었을까요? 일반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안 의사에게 사형을 구형한 일본군 검사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국가안위 노심초사’의 붓글씨를 일본군 검사는 받았겠느냐? 그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귓방망이를 때렸을 것입니다. 이 전달에 관련된 사실은 기록에 적혀있습니다. 일본군 검사는 ‘감사하다’면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일본으로 가져간 안 의사의 유묵을 손자까지 유산으로 보전하다가 결국에는 한국에 기증했습니다.”
 
일본군 검사 후손이 기증한 ‘국가안위 노심초사’는 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위대한 사상을 소중하게 자손 대까지 보전했다는 점을 감동 그 자체이다. 이렇듯 뤼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의 인간 노출은 헌병 간수 찌바도오시찌를 감동으로 물들였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지극히 존경하고 받들어 모셨다.
 
“안 의사를 깊숙이 알면 알수록 감동적인 사연이 많습니다. 나는 인간 안중근에게 반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촌마을에 있는 대림사를 8번이나 왕래했습니다. 한 번의 우연한 인연으로 비석에 적힌 안중근 의사의 친필을 접하고서 저는 제 스승을 찾았습니다. 10여 년 전쯤 안충생 관장을 모시고 일본 대림사에 갔습니다. 그는 안 의사의 사촌동생으로 독립군으로 활동하셨던 분입니다. 독립기념관 관장과 육사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이 사관생도였을 때 육사교장을 하셨던 분입니다. 안충생 관장이 대림사의 주지스님 앞에서 증언한 이야기에서도 진한 존경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안충생 관장은 찌바도우시찌 영정에 절하면서 고마움에 향을 정성스레 피웠습니다.”
 
독립운동가 안충생 증언
 
안충생 관장은 90세 넘으신 독립투사로서의 산 증인이다.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에 참가했을 때 겪은 사건을 이야기했다. 뤼순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를 탈옥시키기 위한 독립군의 숨은 이야기가 있다. 찌바도오시찌 간수가 진정으로 안중근 의사를 모신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안충생 관장은 대림사에 모셔진 안중근 의사와 찌바도오시찌 간수의 두 영정 앞에서 증언을 했다.
 
“독립군이 안 의사를 탈옥을 시키기 위해서 내복 옷겹 속에 비밀지령문을 꿰매서 영치했다고 합니다. 사형수에게 넣어지는 영치물은 담당 짜바도오시찌 간수가 검사했을 겁니다. 지령문을 찾아냈을 겁니다. 찌바도오시찌는 발견한 지령문을 보고하면 안 의사는 바로 즉결 처형이 됩니다. 그런데 묵살해 버렸다고 합니다. 묵살해 버린 사실이 발각되면 자신의 생명도 위협받는 시절이었습니다. 안충생 관장은 이리 고마운 분이기에 내가 여기까지 와서 향을 피운다면서 절을 정성스레 했습니다. 이런 진실에 감격했습니다. 이런 뜻하지 않은 증언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찌바도오시찌는 얼마나 안 의사의 옥바라지를 지극히 했겠는가? 붓글씨를 쓸 때마다 비서처럼 옆에서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와서 그리 했을 겁니다.”
 
안중근 의사의 집행시간이 다가왔다. 아무리 찌바도오시찌가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다 하더라도 집행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형집행 명령을 하달한 사람은 찌바도오시찌였다.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졌으니 집행장으로 끌고 가야 할 사람이었다. 가장 존경하는 동양평화의 의인을 만났던 그가 드디어 통곡을 했다. 국적과 종교가 서로 달랐던 두 사람에게 이별하는 아침 9시에 감방에서는 한 사람의 통곡소리는 메아리쳤다.
 
안 의사 어머니의 독한 말
 
“안 의사는 1심 판결에 승복했습니다. 항소를 포기했던 것입니다. 항소를 포기한 안 의사는 빠른 시간에 처형되었습니다.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이 확정된 뒤 40여일 후 3월 26일 집행되었습니다. 안 의사 어머니의 편지에서도 자식의 생명을 버리라는 독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참으로 큰 어머니의 나라 사랑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1심 판결에 승복해서 비겁하게 생명을 구걸하지 마라. 더 삶을 살고 싶다면서 항소를 하는 것은 추하다. 적 수괴를 참수한 너는 생명을 구걸하지 말라.’ 이런 훌륭한 어머니에게서 안중근 의사가 태어난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그 다음해 1910년 3월 26일 아침 10시에 순국했다. 찌바도오시찌는 사형이 확정된 후 안중근 의사를 손수 챙겼다. 집행장으로 안중근 의사를 끌고 가야 하는 마당에 찌바도오시찌는 돌 벽에 머리를 찧고 통곡했다. 안중근 의사는 죄수복 소맷자락으로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돌 벽에 짓이겨 이마에 흐르는 피를 안 의사는 닦아 주었다고 합니다. 웃으면서 ‘왜 이러느냐? 나는 죽음의 준비가 다 끝났다. 내 얼굴을 봐라. 웃고 있지 않느냐? 네가 왜 통곡을 하느냐?’며 찌바도오시찌를 위로했다고 합니다. 나는 사형수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현장 상황을 잘 파악합니다. 일본 대림사 비문에 적힌 글귀를 보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뤼순감옥도 5번이나 찾았습니다. 비문에 적힌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은 자신의 존경한 찌바도오시찌를 염려하여 남긴 마지막 유묵이었습니다.”
 
헌병 간수에게 건넨 명필
 
안중근 의사는 먼저 일어났다. ‘갑시다! 하던 안중근 의사는 다시 주저앉았다. 찌바도오시찌에게 붓글씨를 한 장 써주고 떠나고 싶었다. ‘너와 내가 만난 지가 오래되었다. 너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딴 사람에게는 다 써주었는데, 정표로 너에게 글을 써주고 싶다.’면서 마지막으로 신세진 정표로 쓴 것이다. 최고의 명필이다. 그 유묵이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에 쓴 위대한 사상이 담긴 예술혼이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2009년 10월 26일부터 2010년 1월 26일, 3개월 동안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를 전시합니다. 지금까지 보존된 작품 50점 모두가 다 명필입니다. 그러나 그 중 한 가지만 꼽으라하면 집행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다시 주저앉아서 찌바도오시찌에게 써주었던 붓글씨입니다. 이 예술 평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이동국 학예사가 했습니다. 마지막 죽음이 매달린 시간에 어떻게 이리 최고의 명필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한 감동은 끝이 없습니다. 아무리 조폭이나 간 큰 사나이라도 ‘집행장으로 갑시다’는 소리에는 온 사지가 저절로 떨립니다. 그런데 안 의사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최고의 명필을 남겼습니다.”
 
붓글씨를 쓰기 전의 마음가짐은 중요하다.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안중근 의사는 명필을 남겼다. 몇 분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가 남긴 붓글씨는 자신을 존경했던 찌바도오시찌 간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일본인 간수와 교도관들은 안중근 의사를 존경했다. 위대한 사상가인 안중근 의사의 인간승리이다.
 
성자와 같은 죽음현장
 
“안 의사의 정신은 생사를 초월했던 것입니다. 죽음이 없는 영혼을 산 사람입니다. 죽음이 있다면 자연히 불안해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집행당할 때도 이런 모습이었을 겁니다, 석가모니가 자연사할 때도 편안히 죽음을 맞았다는 것과 같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어느 성자 못지않게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붓글씨로도 증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러한 내용의 글을 썼겠습니까? ‘나는 대한 제국의 참모중장이다. 순국하는 것이다. 너도 군인이 아니냐? 군인으로서 만주 땅에 뤼순감옥의 간수로서 너의 사명인 조국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각자의 군인신분으로 최선을 다하자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찌바도오시찌는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를 가지고 전역을 했다. 전역 후 자신의 고향 센다이에 돌아갔다. 그의 고향은 대림사 옆 시골마을이었다. 불교신자였던 그는 안중근 의사의 영정을 챙겼다. 불단에 영정뿐만 아니라 붓글씨를 모셨다. 매일 기도했다. 향을 피웠다. 찌바도오시찌가 살아있는 20년 동안 정성스런 향을 피웠다. 대림사 대웅전 앞에 집채만 한 돌비석에 ‘爲國獻身 軍人本分’을 새겼다.
 
“대림사 절에 모셔진 안중근 의사의 영정 사진은 아주 좋습니다. 적이 한국인을 그리 정성스럽게 모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인이었습니다. 뤼순감옥에서 안 의사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일본인은 매일 향을 피웠습니다. 찌바도오시찌는 자신이 죽기 직전 2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영정을 지켰습니다. 그도 죽은 뒤 대림사 절에 묻혔습니다. 그의 아내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안 의사의 영정 옆에 내 영정을 놓고 함께 추모해 달라’ 그래서 찌바도오시찌의 아내는 남편과 안 의사의 영정 앞에서 매일 추모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한국인에게 20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안중근영정 모시는 후손
 
찌바도오시찌의 아내는 자신이 죽기 전까지 영정들을 지켰다. 그들에게는 친 자식이 없어서 양녀를 두었다. 양녀의 이름은 미우라이다. 양녀 미우라는 부모의 유언에 따라 세 영정들 앞에서 매일 추모했다. 삼중스님은 양녀 미우라를 대림사에서 만났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영정들 앞에서 향을 피우는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나이는 70세 정도로 자신의 뒤에 이을 후손에게 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것이라고 한다. 그녀의 자식 대까지는 가능하겠지만 그 아래 후손은 장담할 수 없다면서 걱정을 했다. 참 무섭고 질긴 사연이다.
 
“미우라 여사는 1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1979년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의 축전을 위해 양녀 미우라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을 기증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녀의 아들이 부모의 뜻을 받들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1년에 한번 ‘동양평화사상’이라는 모임을 갖습니다. 일본 전국을 순회하면서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추모를 뜻하는 것입니다. 저도 한 번 그 모임에 참석했는데 그들의 정성스런 모임에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이런 감동에 젖은 시절에 일본의 대림사를 8번, 뤼순감옥을 5번 왕래하였습니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서 유언을 받들고 싶었습니다. 뤼순감옥 뒤편 사형수묘지에 묻힌 안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습니다.”
 
‘조국이 독립되기 이전에는 나의 시신을 고국으로 옮기기 말고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라.’ ‘우리의 국권이 회복되고 조국이 완전독립 되는 날 천국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리라.’는 안중근 의사의 유언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조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상황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그 하나라도 풀어주기 위해 삼중스님은 나섰다.
 
안 의사 유해는 사형수묘지
 
“사형 집행 후 안 의사의 시신은 중국 뤼순 감옥 뒤 사형수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기록에 보면 뤼순 감옥의 사형수 묘지에 묻어놓았다가 다시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 의사는 사형수의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영웅이니 어느 누구도 모르게 연고가 없이 죽은 재소자와 사형수의 묘지에 극비리에 안장되었습니다. 법에 의하면 시신은 가족에게 인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형 집행 시에 두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이 시신을 인수하기 위해 뤼순감옥에 왔습니다. 그러나 시신 인도를 일본은 거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시신을 인도하기 않았을까요? 당연히 안 의사의 시신이 묻힌 곳이 알려지면 그 곳이 독립군의 기지가 된다는 점을 예상했던 것이죠. 일본은 법에도 없는 짓을 했습니다.”
 
삼중스님은 잘 알고 있다. 세월이 90년이 다 된지라 비바람에 씻겨서 봉분도 다 없어졌다. 중국과 수교가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안중근 의사의 묘지를 찾는 것은 힘들었다. 중국과 수교된 뒤에 찾았지만, 사형수의 묘지는 봉분이 보이지 않는 벌판이었다. 더욱이 중국정부가 협조하지 않았다. 또한 다른 장애요소가 도처에 깔려 있었다.
 
“이 말은 아주 조심스럽습니다. 북한 김일성이 생전에 가장 존경한 사람은 안중근 의사였다고 합니다. 나는 절대 북한을 찬양하지 않는 중입니다. 안 의사의 고향은 황해도입니다. 그러니 북한이 연고권을 주장합니다. 북한이 중국과 가까우니 몇 차례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북한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중국 뤼순 감옥 주변에는 북괴 공작원이 퍼져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분교를 잘못 발굴하면 쏴 죽입니다.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실에서도 나는 안 의사의 유해를 찾고 싶었습니다. 내 생전에 그 일을 하다가 죽으면 영광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합니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고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뤼순을 5번이나 갔습니다.”
 
삼중스님은 중국 한 지인에게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에 함께 갈 사람들은 알아보았다. 선득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삼중스님 혼자라도 중국에 가려고 주변을 정리했다. 목숨을 담보로 잡고 가야 할 여행길에는 주머니에 든 모든 것을 정리해야만 했다.
 
살벌한 유해 도굴단 사연
 
“중국 공산당도 무섭지만, 중국이라는 나라는 무서운 면이 아직도 많습니다. 중국에 가려면 주머니에 있는 것들을 다 정리하고 떠나야 합니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은 사람들은 돈을 요구하죠. 내 주머니에 돈이 있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니 내 목숨을 저당 잡히고 가야합니다. 중국 대련에 도착했습니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 놓았던 사람이 ‘돈 가지고 왔느냐?’는 질문부터 합니다. 유해를 찾지도 않고서도 돈 가져오라고 하는 사람 손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 유해를 진짜로 찾았는데, 중국의 법에 따라 유해를 발굴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 공작원들이 주변에 깔려 있다는 소문이 나도는 때라 그들 손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진짜 유해를 찾았더라도 사방에 목숨을 저당잡고 죽음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극히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삼중스님은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2번이나 듣고 그때마다 자신의 주머니를 정리했다고 한다. 한 번은 10월 말경 찾은 대련에서는 겨울이 빨리 찾아와서 눈발이 내렸다고 한다. 왜 그런지 삼중스님의 마음 한구석에는 죽음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달해준 중국인은 삼중스님에게 가장 좋은 호텔에 투숙하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유해를 찾았다는 중국인들이 호텔에 찾아 왔습니다. 제일 좋은 호텔의 귀빈실에서 그들은 만났습니다. 영업용 2대를 대절해서 유해를 찾았던 장소로 떠났습니다. 그날따라 눈발이 휘날리면서 무척 음산했습니다. 겨울이 빨리 오는 곳입니다. 앞서가는 1대에는 중국인, 또 1대에는 우리 일행, 그들 뒤를 따라 달렸습니다. 안 의사의 무덤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무덤에는 안 의사 벼루를 같이 묻었습니다. 또 한 가지의 확인은 일반사형수가 쓰던 그런 관을 쓰지 않았습니다. 일반 사형수는 통나무, 안 의사는 홍소나무로 관을 잘 만들어서 우리나라 식의 관으로 특별대우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관을 보아야만 안 의사의 유해인 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달려가는 내내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대련에서 뤼순까지는 차로 2시간을 달려야 한다. 어두컴컴한 밤에 달리는 도로 주변의 풍경이 겹쳐져서 삼중스님은 불안이 점점 짙어졌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도 못하고 개죽음을 당하는 게 아닌가? 주머니에 들은 돈은 다 빼앗기고 타국에서 뜻도 없이 죽은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목숨을 담보로 유해추적
 
“한 30분 앞차를 뒤쫓아 가다가 택시기사에게 핸들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기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서 요금은 충분히 주겠다고 했습니다. 차를 돌리자마자 빠른 속도로 도주했습니다. 앞선 차가 우리 일행을 뒤쫓아 따라왔습니다. 호텔에 도착해서 한 숨 쉬기도 전에 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내가 건강이 갑자기 나빠져서 오늘 밤은 힘들다, 내일 낮에 가서 보자,’고 했습니다. 그들과 낮에 가 보았더니, 허허벌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점도 추측입니다. 그날 밤에 그곳에 갔더라면 아마도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안 의사의 유해를 찾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속 영원히 살아 있는 영웅의 유언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나의 가슴 속에는 지금도 위대한 안중근 의사가 살아 계십니다.”
민족정기를 온 몸에 간직했던 안중근 의사는 남북한 모두가 존경하는 독립 운동가이다. 안중근 의사가 남긴 독립운동정신이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올 해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 그는 우리에게 민족독립정신,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정의 실현, 동양평화의 정신을 넘겨주었다.
 
브레이크뉴스 / 김성애 sungae.kim@hanmail.net

기사입력: 2009/08/17 [18:05]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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