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호칭,학계에서도 '의사' 아닌 '장군'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제 1회 서울대사학포럼'에서 주장
 
단지12 닷컴
안중근의사에 대한 호칭을 '의사'가 아닌 '장군'으로 해야 한다는 안중근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의 주장과 동일한 학계의 의견이 제기됐다. 안중근청년아카데미는 3년 전부터 안중근의 호칭을 '의사'가 아닌 '장군'으로 하는 캠페인을 전개해 오고 있다.

안중근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는 지난해에 이어 2009년 마라톤 대회 명칭도 "안중근 장근 하얼빈 작전 100주년 기념, 안증근 평화마라톤"이라고 명명한바 있고 동상건립추진 과장에서도 안중근 장군 동상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뿐 만 아니라 '하얼빈 의거' 대신 '하얼빈 작전'이란 명칭도 안중근청년아카데미가 처음 사용한 명칭이다.안중근을 의사가 아닌 장근이라고 할때 하얼빈 의거 보다는 하얼빈 작전이 맞다는 논리다.
 
특히 안중근청년아카데미가 기획 출판한 '소설 안중근, 고독한 영웅'에서도 '장군의 유해를 찾아서'라는 부제를 달아 안중근의 호칭을 의사가 아닌 장군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오고 있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18일 전국은행연합회관에서 열린 제1회 서울대사학인 포럼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라는 주제의 특강을 통해 “올해 안중근 하얼빈 의거 100년을 맞이해 후손들은 그에 대한 호칭인 의사(義士)를 ‘장군’으로 바꾸고, 또 그가 ‘동양평화론’에서 주장한 동아시아 경제(금융) 공동체의 의미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교수는 안중근을 장군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근거로 그가 일본 관동도독부 뤼순지방법원 법정에서 자신은 대한독립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사살한 것이므로 자신에게 적용할 법은 1899년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정한 ‘육전(陸戰)에서의 포로에 관한 법’이라고 주장한 점을 들었다.
 
다음은 이태진 교수의 주제발표 내용 원문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에 해야 할 일>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사) 2009. 6. 18.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100년을 맞이하여 후손들이 반드시 현창해야 할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그에 대한 호칭 義士를 장군으로 바꾸어주는 것, 다른 하나는 그가 「동양평화론」에서 주장한 동아시아 경제(금융) 공동체의 의미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후자는 곧 러시아의 동양 지배를 막기위해 한중일 3국이 경제적 결속을 다지기 위해 은행을 설립하여 공동사용의 화폐를 발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세계사적으로도 가장 앞서는 블록 경제론으로  국제화 시대의 오늘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고 그 뜻을 기려야 할 사실이다.
 
<안중군 장군론>
 
우리의 영웅, 안중근은 일본 관동도독부 여순 지방법원의 법정에서 자신은 대한독립의군의 참모중장으로서 적장을 사살한 것이므로 자신에게 적용할 법은 일본제국의 법이 아닐 뿐 아니라 대한제국의 법이나 대청제국의 법도 아니며, 오로지 1899년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정한 “陸戰에서의 포로에 관한 법”이라고 주장했다. 『안중건사건공판속기록』에 따르면 안중근은 1주일간 열린 재판정에서 이 주장을 4차례나 되풀이 해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그의 진술대로 의거의 배후에 大韓獨立義軍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여순 법원으로 하여금 포수 출신의 한 청년의 잘못된 애국심으로 범한 단독 살인행위로 규정하여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 포로에 관한 법을 적용하면 교전국의 장교나 병사는 사형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뿐더러 그의 주장대로 이 법을 적용할 경우, 대한제국의 신민들이 일본제국의 한국 지배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일본정부는 경계하였다. 일본정부는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일본의 보호 통치를 원하고 있다고 서구 열강들에게 선전해 왔던 것이다.  
 
<공용화폐 발행을 주장한 동양평화론>    

 안중근 장군은 5개월간의 영어(囹圄)에서 3편의 글을 남겼다. (1)「이등박문의 죄악 15가지」(2)「안응칠역사(안중근자서전)」(3)「동양평화론」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3)은 사형 집행일이 다가와 서문과 전감(前鑑)만 쓰고 나머지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 등은 히라이시(平石) 법원장에게 인터뷰를 자청하여 원고에 담길 내용의 요지를 말하였는데, 그 내용이 일본어 통역관 소노끼 스에요시(園木末喜)의 메모로 남아 전한다.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안중근은 일본이 지금까지 주장한대로 러시아가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할 가능성은 많고 그런 조짐도 이미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이를 막기 위해 일본은 일본이 맹주가 되고 중국과 한국이 협력하는 동양평화론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는 결국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있듯이 다른 한 침략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해결책은 한,중,일 3국이 대등한 위치에서 동양평화회의체를 만들어 다음과 같은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3국 공동군단을 건립하여 러시아 군에 대항하는 한편, 은행을 설립하여 3국 통용의 화폐를 발행하여 경제공동체를 이룩하자고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일본은 러일전쟁의 전리품으로 획득한 여순항을 중국에 돌려주고 이를 개방항구로 하여 여기에 동양평화회의의 본부를 두고 은행을 설립하고 또 3국의 주요 지방에 은행지점을 내어 공용화폐를 널리 보급하여 산업발전을 함께 꾀하여야 한다는 하였다. 일본의 여순항 반환의 대가로 경제공동체의 이익 배정에서 시한부로 반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3국의 경제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3국에서 성공하면 인도, 태국, 월남 등의 나라도 회원국으로 가맹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안중근의 경제적 동양평화회의체 구상의 의의>

 한중일 3국의 금융 공동체 구성에 대한 안중근의 착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앞으로 깊이 연구할 대상이다. 현재로서는, 서양 19세기 후반의 저명한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1724~1804)의  『하나의 철학적 기회, 영구평화론』(한국어 번역본, 이한구 옮김, 서광사, 2008)으로부터의 영향설이 가장 유력하다. 칸트는 이 책에서 국제적 연맹의 형태로 “국제국가”와 “평화연맹”을 설정하였는데, 전자는 일본식 동양평화론에 해당하고 후자는 안중근의 것에 해당한다. 후자는 1919년의 “국제연맹”의 사상적 근거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중근은 알사스, 로렌 지방 출신의 프랑스 신부 죠셉 빌럼 신부로부터 프랑스어 공부를 하기도 해서 그로부터 이 책을 전해 받아 읽었거나 그 내용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프랑스어로 이미 번역되어 있었다. 그러나 칸트의 평화론에는 금융문제가 들어 있지 않다.

   안중근은「이등박문의 죄악 15가지」의 여섯째로 “(일본의) 제일은행권을 강제로 사용케 하고 이를 반대하는 소요를 저지하여 한국 내지까지 통용시켜 전국의 재정을 고갈케 한 것”을 들고, 일곱째로 “국채 1300만 엔을 한국에 강제로 지운 것”을 들었다. 이는 안중근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금융 자주권 박탈 행위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을 뜻한다. 대한제국은 1899년에 민간 자본으로 설립된 大韓天一銀行을 국고은행으로 승인하여 앞으로 모든 조세의 납부를 이 은행을 통해 실현하고 국고 지출도 이 은행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한편, 1902년에는 지폐 발행을 위한 中央銀行 설립을 목적으로 그 조례를 인쇄물로 발표하였다.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의 이런 금융 근대화의 노력을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모두 말살하는 정책을 폈고, 안중근은 이 침략행위를 정면으로 지적하면서 그 범죄적 행위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 동양평화론에서 금융공동체의 형성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처음 있는 국제금융 공동체에 관한 제안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서 제시한 한중일 3국의 금융공동체론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하더라도, 1919년의 국제연맹보다 10년이 앞선다. 이것은 오늘날 국제화 시대를 맞이하여 후손들이 세계에 널리 알리면서 한국 경제가 평화적으로 세계 각국과의 협력 속에 공동 번영을 꾀하는 역사적 소재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의 이러한 큰 규모의 경제사상을 드러내 주는 것은 의거 100년을 진정하게 기리는 첫 번 째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사입력: 2009/06/20 [23:37]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