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신분, 의사 보다 군인이 맞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보다는 장군이라 부르자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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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국방부 신청사


최근 용산 국방부에 볼일이 있어서 들른 적이 있습니다.가기 전에 전쟁기념관 맞은편 언덕에 있는 건물일거라고 생각했는데,안내자를 따라 가 도착한 곳은 그 뒷편에 새로 지은 신청사였습니다.
우리 군의 최고지휘부다 보니 ‘별판’을 단 차도 여럿 보였구요, 청사 앞에는 의장대 사열용 연병장도 하나 있더군요.

현관에 들어서면서 저는 제 눈을 잠시 의심했습니다.
현관 좌우로 흉상 세 개가 서 있는데, 모두 뜻밖의 인물들이었습니다.그간의 제 상식으로는, 국방부가 현관 앞에 내세울 ‘상징적 인물’이라면,적어도 한국전쟁이나 월남전 ‘전쟁영웅’들일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서 있는 여섯 분은 모두 일제 당시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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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신청사 현관. 현관 좌우로 독립운동가 흉상이 3개씩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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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왼편. 강우규-박승환-안중근 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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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오른편. 홍범도-윤봉길-이봉창 순임.


 
 
현관 왼편으로는 강우규, 박승환, 안중근.
현관 오른편으로는 홍범도, 윤봉길, 이봉창.

(*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여기도 흉상이 좌우로 전시돼 있었는데,김좌진, 신돌석, 이강년, 유인석, 강감찬, 이순신, 을지문덕 등이었음) 낯익은 순서로는 아마 안중근-윤봉길-이봉창 순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데 우리는 이 분들을 모두 ‘의사(義士)’라고 부릅니다.물론 틀린 답은 아닙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구요.

그러면 나머지 세 분, 홍범도 박승환 강우규는 어떤 분들일까요?

홍범도(洪範圖, 1868~1943).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만주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군이었습니다. 1920년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에서 독립군 전투 사상 최대의 승전을 기록하였으며, 뒤이어 청산리 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박승환(朴昇煥, 1869~1907). 한말의 순국지사(殉國志士). 1907년 고종의 강제 양위와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때 시위연대 제1대대장으로 복위운동을 꾀하려다 실패하자 일제의 군대해산 명령과 동시에 권총으로 자결하였습니다. 그의 자결은 이후 무력항쟁의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강우규(姜宇奎, 1855~1920). 대한노인동맹단의 일원으로, 1919년 9월 2일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체포돼 이듬해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65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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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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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환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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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이 세 분 가운데 홍범도는 ‘장군’, 박승환은 ‘대장’, 강우규는 ‘의사’로 불립니다.위의 소개에서 보듯이 공통점은 모두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분’들입니다.즉, 이 분들은 대한제국, 혹은 임시정부 시절 공식, 비공식 군대의 일원입니다.굳이 따지자면 이 분들은 신분은 정규군, 비정규군을 떠나 모두 ‘군인’입니다.

덧붙인다면, ‘임진왜란’은 ‘임진년에 일본인들이 일으킨 난’이 아닙니다.
무장한 일본군이 현해탄을 건너 조선을 침략해온, 이른바 ‘군사공격’입니다. 그러니 ‘임진왜란’은 이제부터라도 ‘조일(朝日)전쟁’으로 바꿔야 마땅합니다.

당연한 귀결로 일제 당시 ‘독립운동’ ‘3.1운동’도 결코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영어식으로 표기하자면, ‘무브먼트(Movement)’가아니라는 얘깁니다. 다시말해 ‘3.1운동’은 구한말의 문맹퇴치와 같은 ‘계몽운동’과는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독립운동’이라는 표현은 ’독립전쟁’으로 바꿔 불러야 마땅합니다.

‘임진왜란’ ‘병자수호조약’ ‘을미사변’ ‘을사조약’ ‘항일병합’ ‘3.1운동’ 등등...
이런 식의 역사용어는 바로 일제 당시의 ‘식민사관’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일제잔재 청산은 이런 역사용어 정화에서부터 시작돼야합니다.

국방부가 우리 국군의 뿌리를 해방 후 창군(創軍)으로부터 잡지 않고,
일제 당시 항일투쟁 세력들로부터 잡은 것은 참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정규군의 일원이든, 아니면 의열 투쟁을 한 개인이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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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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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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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처단한 후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한국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하여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고향(황해도 해주)에서 평양으로 나와 사비를 털어 교육사업 등 인재양성에 힘쓰던 안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로 국운이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러시아 연해주 망명하여 의병투쟁에 참가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전제덕의 휘하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 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해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안중근은 1909년 의거를 일으켜 ‘의사’가 되기 이전에 이미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간 우리는 안중근을 ‘의사’로만 규정해온 감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일제 하 독립전쟁사를 우리 군에서 자랑스런 역사로 앞세워야할 것입니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경우 상해임시정부 시절 백범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단원이었습니다. 윤 의사가 던진 폭탄은 임시정부에서 마련해 준 것이며, 이 의사의 거사자금도 역시 임시정부에서 마련해준 준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이들은 육군 특수부대 소속 특공요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 우리 군의 뿌리를 정부수립 이후의 군으로만 한정해 부각시킨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군의 뿌리는 엄연히 항일 독립투쟁세력과 임시정부의 광복군입니다. 그들의 정신과 위업을 ‘뿌리’로 삼을 때 비로소 우리 군의 정통성이 확보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 국방부의 역사인식과 자세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탐인 정운현의 역사와의 대화 http://tamin.kr/ >

기사입력: 2009/05/22 [14:07]  최종편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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