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뤼순감옥 뒷산에 묻힌 유해 발굴사업과는 별도로, 안 의사가 조국독립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자른 왼손 무명지의 행방은 수십년 동안 연구자들의 애를 태워왔다.
안 의사는 1909년 2월9일 러시아와 중국의 경계에 있던 얀치허 부근 하리 마을에서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를 자른 뒤 선혈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이라는 넉자를 크게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세번 불렀다.
이후 손가락과 ‘대한독립’이 혈서된 대한민국기는 안 의사와 같이 손가락을 자른 ‘정천단지회’(단지동맹) 맹우인 백규삼의 집에 보관돼 있다가, 안 의사 가족들의 간청으로 1912년 1월 이전 가족들에게 돌아갔지만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 안 의사의 손가락(사진)과 ‘대한독립기’의 사진이 국내 신문에 한두 차례 소개되고, 안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엽서 표지에 실리면서 조선 청년들의 의기를 일깨웠다.
그의 의기를 상징하는 손가락과 대한민국기는 어디에 잠들어 있을까?
일본인 간수에게 유묵? “감사표시로 줬다”주장에 “허구”반론도
안 의사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일화는 그가 순국 직전 자신을 돌봐준 간수 치바 도시치(당시 24·사진)에게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글씨를 써줬다는 것이다. 이 사연은 치바의 묘비가 있는 대림사 주지 사이토 다이켄(70)이 1993년 <내 마음의 안중근>이라는 책에서 소개하면서 유명해졌다.
그렇지만 국내의 안 의사 연구자들은 이 얘기가 사이토가 지어낸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치바 도시치는 일본 육군 관동도독부 소속 육군 헌병 상등병으로 이토를 저격한 유명 정치범에게 사형 집행 5분 전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운룡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책임연구원은 “<…안중근>에는 안 의사와 치바가 동양 평화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는 기록이 많지만 당시 안 의사는 일본어를 못했고 치바도 한국말을 못해 둘 사이의 직접 대화는 불가능했다”며 “일본 육군 헌병이 뤼순감옥 간수를 했다는 주장도 당시 사료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치바를 위해 글씨를 쓰고 있어야 할 안 의사가 사형 집행 5분 전에 흰색 무명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이 전해지는 점이나, 지체가 높은 사람에게 글을 써 올릴 때 붙이는 ‘근배’(謹拜·삼가 올린다)라는 글씨가 붙어 있는 점도 이런 의구심을 뒷받침한다.
그렇지만 치바 도시치라는 한 일본인이 진심으로 안 의사를 숭모했고, 그의 유가족이 70년 만인 지난 79년 그의 유묵을 서울 남산 안중근 기념관에 전한 사연은 한-일 두 나라 우정의 상징이 되고 있다.
독립때까지 금주 약속, 을사조약전 술고래…죽을때까지 결심 지켜
안 의사가 1910년 뤼순감옥에서 쓴 <안응칠 역사>를 보면 그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평생 즐기고 좋아해, 실컷 술을 마시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기생방에서 놀기도 좋아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안 의사는 술버릇이 좋지만은 않았던지, 기생들의 태도가 공손하지 않으면 욕을 하거나 때려 ‘번개 입’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안 의사는 1905년 술을 끊기로 맹세한다. 같은 해, 조선독립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러 중국 산둥·상하이 등을 헤매다가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안 의사는 죄책감에 통곡하다 “대한독립이 이뤄지는 날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1909년 12월21일 관동도독부 감옥(뤼순감옥)에서 벌어진 9차 신문에서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리며 술을 마시러 나간 적이 있는가”라는 미조부치 타카오 검찰관의 질문에 “나는 술을 마시지 않으며 어디에도 간 적이 없다”고 답한다. 또 1910년 1월25일 벌어진 11차 신문에서도 거사를 앞두고 동지인 조도선이 술을 사와서 동료들에게 마시라고 권했지만 안 의사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거절하는 진술이 나와 있다. <한겨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