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장군 순국 108주기 전남 함평 추도식 순서]
-안중근 노래(음반)
-개회(함평 동상 소개 및 추도식 준비 과정 소개)
-참석자 소개(함평 중학교 / 바르게살기 전남도협의회 / 함평군청)
-국민의례
-이등박문 15가지 죄상(상임이사)
-안중근 장군 유언 낭독
1) 동포에게 고함(함평 중)
2) 두동생에게(함평 중)
3) 어머님 전상서(함평 중)
4) 분도 어머니에게(함평 중)
- 대표 헌화(함평 중 인솔 책임자)
- 전체 묵념(음향)
- 추도인사(현장 참석자 중에서)
- 단체 기념사진 찍기(학생 들 별도)
- 산회
이등박문의 15가지 죄상
1. 한국의 명성황후(明星皇后)를 죽인 죄
2. 고종황제(高宗皇帝)를 왕의 자리에서 내친 죄
3. 을사조약 5조약과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독립을 요구하는 죄없는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 정치 체제로 바꾼 죄
6. 철도, 광산, 농림, 산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죄
8.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9.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죄
11. 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두 빼앗아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14. 대륙(중국)을 침략하여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
안중근 의사의 유언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느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산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순국하기 직전 두 동생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어머님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있으니 마음을 평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大要)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 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 아들 도마 올림 -
<분도(맏아들)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히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많고 많은 사연은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 1910년 경술 2월 14일 장부 도마 올림 -
<안중근 장군 약전>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려고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열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는 안중근 장군입니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걸쳐 검은 점이 7개 박혀 있어 북두칠성에 응한 것이라 하여 아명을 응칠이라 불렀고, 망명 후 구국활동 때 이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일찍부터 글을 배워 사서삼경과 통감을 통달해 문사의 앞날도 기약 하면서 말타기 활쏘기를 익혀 무사의 기상을 높혔습니다.
1894년 나이 16살 때에 동학혁명을 빙자한 지방무리들의 소요가 일어나자 부친이 모집한 장병을 이끌고 선봉장으로 용전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김홍섭의 딸 김아려 규수와 결혼하였고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명을 도마(多默 : Thomas)라고 하였으며, 조셉 빌렘(洪錫九) 신부에게서 불어를 배우고 서구의 새로운 지식도 넓혔습니다.
그후 10년이 지나 1905년 나이 27세 때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5조약 소식을 듣고 일제의 불법침략을 세계에 알리며 구국 방도를 찾고자 상해로 건너갔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워 구국영재 양성에 전력을 쏟았습니다.
1907년 8월, 일제에 의한 우리나라 군대의 강제 해산을 지켜 본 청년 안중근은 가슴에 끓는 피를 간직한 29세에 구국 결의를 다지며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해 의병 부대인 대한의군을 창설하고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의 직함으로 무장항일투쟁을 결행하였습니다.
1908년 7월, 의병 300여명을 인솔하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육진 지역에 진군, 경흥 등지에서 일군경과 교전, 두 차례 승첩을 올렸으나 회녕 영산의 3번째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패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이듬해 초봄 연해주 크라스키노 하리 마을에서 조국독립을 위한 동의 단지회를 결성했습니다.
12명의 동지들이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각기 한 칼로 잘라내어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조국독립에 헌신하기로 혈맹한 것입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등박문이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때야말로 나라와 겨레의 원수를 갚을 호기로 판단, 우덕순 동지와 함께 하얼빈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진 9시, 삼엄한 경계망을 편 하얼빈 역두에 한국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토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려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는 순간 전광석화와 같이 권총을 꺼내들고 이등을 향하여 연발 의탄을 쏘아 이등박문을 제거하는데 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안중근 장군은 재판에서 '나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이고 특파독립대 대장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적의 괴수 이등박문을 총살 응징한 것이다' 라고 밝혔습니다.
재판과장에서 이등박문의 죄상을 15가지로 적시해서 전세계에 알린 안중근 장군은 침울한 감방에서 『안응칠역사』라고 표제한 자서전과『동양평화론』서문을 집필했습니다.
또한 안중근 장군은 감방에서 그의 높은 기품을 담은 [국가안위노심초사], ]위국헌신군인본분] 등을 비롯한 수십편의 유묵을 썼습니다.
일제의 무도한 재판은 1910년 2월 14일 겨우 6회 개정으로 안중근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안중근 장군은 하얼빈 전투 후 5개월에 걸쳐 여순감방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조금도 굽히지 대한 남아의 기상을 지키면서 1910년 3월 26일 2천만 동포에게 뼈에 사무치는 조국 독립의 유언을 남기고 여순형장에서 조용히 순국하니, 때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이고, 향년이 32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