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3월 26일 오전,
중국 대련지역 뤼순 감옥에서는 민족의 큰 별이 교수대에 섰습니다.
그 이름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
조국 독립전쟁 중 하얼빈 특공작전에서 일본 적장 이등방문을 사살한 공적을 세운 후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일본 측에 넘겨진 후 6개월 동안 뤼순에서 전세계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을 폭로한 법정투쟁을 하신 후 순국하신 날이 102년 전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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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경기도 부천시청 옆 아담한 공원에 안중근 장군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이 동상은 특별한 스토리를 갖고 있는 동상입니다.
2006년 1월 16일, 중국 하얼빈에서 만들어진 안중근 장군 동상은 하얼빈 번화가에 당당하게 세워집니다.
그 후 11일만에 중국 정부의 요청에 의해 동상은 철거되어 실내로 옮겨져야했습니다.
이유인즉, 중국 법에 외국인 동상을 공공 야외장소에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중근 장군 동상은 실내에서 4년 넘게 긴 침묵을 합니다.
2009년 8월 15일,
광복절에 중국 하얼빈 시 한적한 지하실에서 오랫동안 침묵했던 안중근 동상은 햇볕있는 세상으로 나와 하얼빈 역과 하얼빈 공원을 지나 창춘- 심양-대련으로 이동, 뤼순감옥 앞마당을 거쳐 뤼순 재판소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장군이 사형선고를 받은 그 법정입니다.
뤼순 재판소 앞마당서 14일을 보낸 동상은 9월 2일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들어옵니다. 이날은 안중근 장군 생일입니다.
유해대신 동상으로 고국에 온 안중근 동상은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앞뜰에서 49일을 보냅니다.
그리고
10월 26일 부천시청 옆 중동공원에 안착합니다.
부천시는 동상이 도착하기 3일 전 '중동 공원'이름을 '안중근 공원'으로 개명합니다.
대한민국에 안중근공원 제 1호가 만들어진것입니다.
안중근 장군 동상이 안중근 공원에 우뚝 선 날은 안중근 장군 하얼빈 작전 1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2012년 3월 26일 아침,
안중근 공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동상 주변에 태극기를 하나씩 꽂았습니다.
5백개 태극기가 동상 밑을 휘감았습니다.
안중근과 태극기는 특별한 인연이있습니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 장군은 손가락을 절단한 붉은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내글짜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안중근 혈서태극기'입니다.
청년 안중근은 대원들과 함께 조국 독립을 위해 죽기를 맹세한 것입니다.
이것을 '12인의 단지동맹'이라고 합니다.
태극기에는 안중근 청년 안중근의 민족 혼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태극기의 날'제정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안중근의 민족 혼은 조국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은 안중근 장군이 바라는 조국의 모습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안중근 장군은 '고독한 장군'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고독한 안중근 장군을 외롭지 않게 해줘야 하는 일을 해내야 합니다.
슬픈 안중근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족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크게는 분단 조국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 사회가 하나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포화합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
시간이, 세월이 지날 수록 분열이 봉합되고 갈등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분열이 더욱 더 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분열과 갈등, 경제적 분열과 갈등, 사회적 분열 갈등이 세월이 지날 수록 더 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중근의 민족 혼에는 '더불어 함께 살자'는 평화정신이 들어있습니다.
대한민국이 가진 자들의 나라가 아닌 모두 함께 살아가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돕고 사는 동포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서로 돕는 동포애는 크게는 남북 간에도 절실합니다. 남북간 화해, 교류협력도 안중근 평화정신 속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안중근 평화정신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순국 102주기를 맞아 안중근 정신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광일 / 안중근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 대표
*** 사진은 3월 26일 오전 부천 안중근 공원에서 보통사람들이 준비한 안중근 장군 순국 102주기 추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