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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유해찾기 보다 정신계승이 중요
<안중근 10.26 특별기고> 왜 한줌의 흙에 연연하는가?
 
문일석   기사입력  2010/10/27 [08:12]
안 의사 유해가 찾아지지 않는다 해도 정신적 위업은 영원!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한반도 침략의 원흉인 이토(伊藤博文)를 저격했다. 그는 하얼빈 역에 도착하는 이토를 향해 권총을 발사, 3발이 명중, 절명시켰다. 안 의사는 재판 중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라고 피력했다.
 
최근 들어 정치권에서 안중근 의사(1879년∼1910년)의 유해찾기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대변인)은 지난 10월 22일 일본 동경에서 열린 안 의사 유해발굴추진 국제심포지엄에서 “일본은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100년의 한일관계를 위해서라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의원은 이날 동경의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회관에서 한나라당의 이주영 의원, 민주당의 우윤근 의원과 함께 “‘유해를 고국에 묻어달라’ 그후 100년”이라는 제목의 안 의사 유해발굴추진 국제심포지엄을 공동으로 주최했었다. 
 
▲ 안중근 의사 
박 의원은 이 심포지엄에서 “100년 전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한중일 3국이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해 공동평화협의체 구성을 제안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지금, 정치·경제·안보 등에서 여러 가지 위기를 맞고 있는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일본,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면서 “남북을 비롯해 중국, 일본 등 안 의사를 존경하는 모든 이들이 합심해 안 의사의 사상을 계승·발전시킴과 동시에 안 의사의 유언대로 그의 유해를 고국으로 하루 빨리 모실 수 있도록 모든 정보를 갖고 있는 일본이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안타깝게도 현실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는 장소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새로운 100년,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재정립을 위해서라도 일본은 안 의사의 유해발굴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일제 당시의 관련문건 일체를 모두 공개하는 실천적 행동으로 화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안중근기념사업회의 신운용 박사는 “남북한과, 중국 일본이 공동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조사․발굴 송환 위원회'를 조직해 안 의사의 ‘동양평화’를 구현하라는 유언을 실천하자”고 강조했다. 일본의 영화감독 구스노키 게이스케(楠啓介)는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영화를 기획 중인데 “안중근에 대한 허상이 아닌 실제적인 인식이 한일 양국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자는 정치권에서 추진하고 있는 안 의사의 유해찾기 작업을 반대한다.
 
왜냐면, 역사는 반복될 수도 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강해진 국력을 전쟁으로 과시했다. 그래서 한반도와 중국까지 침략, 강점했었다. 안 의사의 유해찾기 보다 이 시대의 제국주의에 의해 또 다른 식민지 생활을 당해선 안된다는 의지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 편하게 안장한다는 것은 혈족이나 국민들에게 숙원사항일 수 있다. 이 점은 남북 공히 같은 생각일 것이다. 모든 물질은 땅으로 돌아가 썩는다. 인간의 육체도 사망하면 물질이기 때문에 자연에 귀속된다. 그런데 여러 조건이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없는 형국이 된 듯하다.
 
우선, 중국 정부는 이미 사망한 육신(시신)을 땅에 묻지 못하도록 법제화 했다. 매장문화를 없앤 것이다. 안 의사 유해를 암장한 자리에 도시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제에 대한 악감정은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매 일반이다. 일제에 피해를 당한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안 의사를 존경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인들이 결행하지 못했던 침략자를 응징 살해하고, 자신도 사형장의 이슬이 됐기 때문이다. 중국 하얼빈 당국은 하얼빈 역 건물 내에 안 의사의 위업을 기리는 추모관을 만들기도 했었다.
 
필자는 안 의사가 남긴 유언이 곧 유해라고 생각한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중국의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했다. 사형되기 직전 정근(定根)·공근(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면서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했었다.

그가 오늘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함은 '독립'이었다. 우리는 진정한 독립을 성취했는가? 일제식민지 생활 이후, 남북한이 전쟁을 치르고 지금껏 분단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안 의사는 침략국 일제의 법정에 의해 사형을 받는 순간, 역사 속의 인물로 부활했다. 기독교의 창교자인 예수의 십자가 사망 이후 그의 사체를 찾으려는 노력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 사망을 부활로 승화시켜 숭배하고 있다. 주후 2000년이 지난 지금에 예수의 사체가 발굴된다해도 그의 정신적 위업에 영향을 미치진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 의사의  목숨을 건 침략자 살해결행은 한반도의 독립의지의 발현이라는 숭고한 정신으로 이미 승화됐다. 유해는 일제에 의해 그 어딘가에 묻혔지만, 그의 정신은 한반도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라는 고귀한 역사의 제단 속에 면면이 살아 있는 것이다. 사후 101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미 소실돼버릴 수도 있는 유해를 찾아낸다고 해서 그의 숭고한 정신에 어떤 질적 변화가 오겠는가?
 
일제와 저항했던 유-무명 투사들이 많다. 안 의사의 유해를 찾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안 의사 유해찾기 논란이 일어난 것을 기점으로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무명 인사나, 그 가족들에게도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안 의사의 유해가 찾아지지 않는다 해도 그의 정신적 위업이 손상을 입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미 찾기 어려워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자고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하는 것이다. 왜 한 줌 흙에 연연하는가?
 
안 의사는 이미 역사 속에 부활,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민족이 존경하는 위인-의사로 우리의 정신 속에 살아남아,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평화를 깬 무력 침략자를 질타하며, 동양평화의 꺼지지 않는 등대불로 숭앙되어질 될 것이다.
 
<문일석 / 브레이크뉴스 발행인 moonilsuk@kore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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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10/27 [08:12]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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