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은 안중근 장군이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은 남북한 모두가 안 장군을 추모하는 날이기도 하다. 북한도 안 장군을 높이 평가한다. 김일성이 1986년 중국의 뤼순(旅順) 감옥을 방문해 장군의 유해를 발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북한은 이처럼 김일성 다음으로 안 장군을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인정한다.
김일성의 전기인 ‘세기와 더불어’에 “아버지로부터 안중근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는 구절이 나온다. 북한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도 “20세기 초 우리나라 반일 애국운동가, 일제의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애국 열사”로 서술하며, 저격 장면과 계기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북한은 안 장군과 관련된 여러 편의 소설과 연극·영화를 만들었다. 1958년에 ‘애국열사 안중근’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이 출간되고, 연극으로 공연된 바 있다. 1979년에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영화도 개봉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1909년 10월 이토가 장차 일제의 영토가 될 만주 순방길에 오른다. 이토는 한반도 병합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던 일본의 전 총리이자 초대 조선 통감과 추밀원 의장을 지냈다. 이미 그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고, 을사늑약에 찬성했던 을사5적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수립하는 등 대한제국을 뿌리째 흔들고 있었다. 이번 순방은 중국 침략에 앞서 한반도 병합에 대한 러시아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1907년 의병활동에 투신한 뒤 연해주에 있던 안 장군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다. 그해 10월 26일 이토가 러시아와 회담을 위해 하얼빈 역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안 장군은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26일 아침 9시 30분쯤, 하얼빈 역에 내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는 이토를 안 장군이 저격해 사살한다. 이어 우렁찬 목소리로 “대한국 만세(코레아 우라)”를 외치며 의연하게 체포됐고, 뤼순 감옥으로 옮겨진 후 1910년 3월 26일 감옥에서 순국한다.
안 장군의 일대기를 담은 이 영화는 장군이 이토를 제거하기까지의 시대 상황을 생생히 재현한 대하 역사물이다.
북한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유명배우가 총출연했고, 막대한 제작비와 수천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됐다. 특히 이토를 제거한 역사의 현장인 만주 하얼빈에서 촬영함으로써 사실성이 뛰어나 북한 영화 가운데서도 수작으로 꼽힌다.
북한은 이 작품에서 일제의 식민지 당시의 사회·역사적 현실을 시대적 배경으로 안 장군의 애국적 활동과 투쟁을 묘사했다. 또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세트장 현장을 보존하고, 기념주화와 우표도 발행하는 등 안 장군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방법으로는 나라의 독립과 자주권을 찾을 수 없었다”고 평가 절하한다. 북한의 통일신보는 “안 장군은 탁월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탓에 혼자 독립운동하는 데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고, 한몸 바쳐서도 독립 염원을 이룰 수 없었던 민족의 풍운아”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안 장군의 실패한 의거는 “수령의 영도 밑에 올바른 지도사상을 갖고 광범한 인민대중이 조직적으로 혁명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했다”며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로 귀결했다.
안 장군의 후손 20여 명이 북한에 생존해 있다. 장군의 막내 동생인 안공근의 아들 ‘독립운동가 안우생’의 유족 20여 명이 평양을 비롯한 북한 각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안우생의 묘를 찾아 헌화했다. 북한의 애국열사릉은 우리의 국립현충원과 유사하다. 안우생은 안 장군이 순국한 후 김구의 대외 담당비서로 일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안 장군 유해발굴을 촉구하기 위해 김구 선생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가 홀로 남아 활동하다 1991년 사망했다.
평안남도 남포시 남포공원에는 안 장군이 독립 계몽운동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 근대사에서 남북한 모두에게 존경받는 역사적인 인물이 있다면 안 장군이 유일하다.
<윤규식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