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와 안중근 집안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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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손녀 김미 & 안중근 조카손녀 안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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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12 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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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기사입력 |
2007/05/19 [1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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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손녀 김미 & 안중근 조카손녀 안기수 |
“백범家·안중근家는 적으로 만나 사돈이자 동지 됐죠” |
이남희 동아일보 여성동아 기자 irun@donga.com |
● 백범 장남 김인과 안중근 의사 조카딸 안미생 결혼 ● 안 의사 동생, 사촌형제, 조카들은 백범과 함께 독립운동 ● 미국, 북한, 파나마, 독일로 뿔뿔이 흩어진 안 의사 후손들 ● 백범, 1948년 김일성에게 안 의사 유해 공동 발굴 제안 ● 경교장에서 쫓겨난 백범 유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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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만난 안기수씨와(왼쪽) 김미씨. 가을바람이 상쾌하던 9월 중순,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선 백범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의 탄생 130주년을 맞아 특별전 ‘백범 김구 선생의 길, 그리고 희망’이 열렸다. 백범이 서거 당시 입은 혈의(血衣), 윤봉길 의사가 의거 전 백범과 교환했던 시계, 백범의 휘호 40여 점 등이 전시됐다.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939년 임시정부 주석으로 활동하던 백범이 중국 충칭(重慶)에서 장남 인(金仁·1918∼45), 차남 신(金信·84·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과 함께 촬영한 가족사진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느라 가족과 보낸 시간이 거의 없던 김구 선생이 두 아들과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그런데 이 소중한 사진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의 조카손녀 안기수(安基秀·51)씨 덕분이다. 안씨가 집안 대대로 간직해온 이 사진을 최근 사진 속 주인공인 김신 회장에게 기증한 것. 안중근 의사의 자손이 백범 일가 사진을 소장한 배경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한국 독립운동의 두 거두인 김구 선생 가문과 안중근 의사 가문이 오랜 인연을 맺어왔던 것이다. 안기수씨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정근씨의 손녀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안기수씨의 고모인 안미생씨는 김구 선생의 장남인 김인씨와 혼인했다. 백범 가문과 안중근 의사 가문은 사돈지간에 머물지 않고, 몇 대에 걸쳐 독립운동의 동지로 결합했다. ‘백범일지’에 안중근 의사 집안 사람들(친동생인 공근, 정근, 사촌인 명근, 경근 등)이 대거 등장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사진 기증을 계기로 김구 선생의 손녀 김미(金美·49)씨와 안중근 의사의 조카손녀 안기수씨가 처음으로 만났다. 두 사람은 “첫 대면에서 마치 헤어진 가족을 찾은 듯 반가웠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만남은 두 독립운동가(家)의 재회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미씨는 백범의 차남 김신 회장의 3남1녀 중 막내딸로, 빙그레 김호연(金昊淵·51) 회장의 부인이다. 김씨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며 재벌 총수의 부인이라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지만, 줄곧 ‘왼손이 하는 일, 오른손도 모르게’를 고집하며 조용히 대외활동을 해왔다. 맹인교회의 도우미로, ‘푸드뱅크’ 주관 노숙자 돕기 행사의 자원봉사자로 일했고, 최근에는 국제 어린이 보호재단인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의 이사로 활동 중이다. 그는 조부의 이름에 흠집을 내지 않도록 늘 몸가짐을 조심한다고 한다. 재벌 총수 부인과 프랑스어 번역가 삼성생명 FC(파이낸셜 컨설턴트)로 일하는 안기수씨는 연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한때 프랑스어 번역가로 활동했다. 부친인 안진생(1918∼88) 전 미얀마 주재 대사는 이탈리아 제노아 공대를 졸업한 한국인 최초의 조선공학 박사로 18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다. 안중근 의사와 두 형제(정근, 공근)의 자손 중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안 전 대사 가족뿐이다. 9월29일 백범기념관에서 김미씨와 안기수씨를 함께 인터뷰했다. 두 사람은 ‘잊힌 역사를 기록한다’는 취지에 공감하고 ‘신동아’의 인터뷰 제의에 응했다. 가녀린 몸매에 단아한 기품이 흐르는 김미씨와 갸름한 얼굴에 단정한 인상의 안기수씨는 놀랍게도 친자매처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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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이 1939년 중국 충칭에서 장남 인(왼쪽), 차남 신(오른쪽)과 함께 촬영한 가족사진. 안기수씨가 김신 회장에게 기증하면서 최초로 공개됐다. ▼ 이번에 공개된 김구 선생의 가족사진은 두 분 에게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안기수 : “저희 할머니께서 그 사진을 간직해오셨어요. 누구보다 김신 회장께 소중할 것 같아 사진을 기증하게 됐습니다.” 김미 : “아버지(김신)께서 삼부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 없어 늘 아쉬워하셨는데 사진을 보시고 정말 기뻐하셨어요. 사진을 촬영한 시기는 아버지께서 고등학생이던 1939년인데, 처음엔 그런 사진을 찍었는지도 모르셨나봐요. 사진을 보시더니 ‘형님(김인)이 키도 크고 잘생기셨다’며 그때 기억을 떠올리셨어요. 할아버지(백범)께선 독립운동을 하시느라 가족과 함께 지내신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할아버지를 처음 뵌 것이 열일곱 살 때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저녁 때 집에 잠시 들르셨다는데, 당시 아버지께선 얼굴에 얽은 자국이 있고 체격도 큰 할아버지를 보며 ‘무섭게 생겼다’고 생각하셨대요(웃음).” ▼ 백범 가문과 안 의사 가문은 언제 처음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김미 : “‘백범일지’에 조부와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 진사와의 첫 만남이 등장합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19세였던 할아버지는 농민군의 접주였고, 안태훈 진사는 농민군을 토벌하려는 갑오의려의 대장이었죠. 두 사람은 비록 적대적 위치에 있었지만, 상대방의 인품을 높이 사 서로 배려한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동학농민군으로 관군과 싸우고 계실 때 안 진사가 할아버지께 밀사를 보내 ‘군이 나이는 어리지만 대단한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겠다. 군이 무모하게 싸우다 죽으면 인재가 아깝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자신을 반대하던 일부 농민군 세력의 습격을 받았을 때 안태훈 진사에게 몸을 의탁했고, 그때 안중근 의사를 처음 만나셨지요.” 미국으로 떠난 안 의사 조카 백범과 안 의사는 활동 반경이 달랐기에 두 사람이 함께 독립운동을 도모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멀리서나마 서로의 행보를 전해듣고 지지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당시 국내에서 교육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백범은 안 의사 가문과 인연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돼 황해도 해주의 유치장에 한 달 동안 갇혔다가 하얼빈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밝혀져 불구속 기소로 풀려났다. 백범은 이후 안 의사의 유가족을 각별하게 챙겼다. 안 의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1937년 일본군의 공세로 중국 상하이가 위태로울 때 백범이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구출하기 위해 노심초사했음을 ‘백범일지’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안심하고 홍콩으로 갔는데, 특히 안정근 안공근 두 사람에게 부탁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란 그들의 형수인 안 의사 부인을 상해에서 모셔내어 왜놈의 점령구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중략) 홍콩에서 마침 비밀공작으로 상해로 파견돼 있던 유서(柳絮)와 같이 안군 형제와 회의하면서 나는 형수를 상해의 적 치하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으나 그들은 난색을 보였다. 나는 이치를 따지며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부터 옮겨 내는 것처럼 우리는 혁명가로서 의사 부인을 적 치하에서 구출하는 것 이상의 급선무는 없다”고 했지만, 그러나 실은 그때는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백범학술원 간행 ‘백범일지’ 380쪽)
| 1919년 중국 상하이에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두 가문은 다시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안 의사의 친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이 형의 유지에 따라 독립투사가 되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특히 안정근의 차녀 안미생이 백범의 장남 김인과 혼인함으로써 두 가문은 사돈관계로 발전했다. 그 후 김인은 일본군이 점령한 상하이에서 마지막까지 활동하다가 홍콩을 통해 충칭으로 갔다고 한다. ▼ 안미생 여사와 김인 선생은 어떻게 만나 결혼에 이르렀습니까. 김미 : “두 분이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연애결혼을 하신 걸로 압니다. 할아버지께서 큰어머니(안미생)를 특히 아끼셨대요. ‘훌륭한 집안의 자제이니 물어볼 것도 없다’며 흔쾌히 며느리로 맞으셨답니다. 그 시절 여성이 독립운동 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큰어머니께서는 할아버지 비서로 활동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큰아버지께서 28세의 나이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어머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생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가족이라고 해서 따로 챙길 여건이 못 됐기 때문에 큰아버지는 약 한 첩 제대로 못 써보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그걸 두고두고 가슴 아파하셨고 큰어머니에게 더없이 미안해하셨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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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씨(왼쪽)가 안기수씨와 함께 백범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 안미생 여사는 광복 후 미국으로 건너가셨죠? 안기수 : “미생 고모께선 ‘남편이 없는 이 나라에 살기 싫다’고 말씀하셨대요. 건국운동의 숨은 주역인 고모께서 막상 고국에 돌아와보니 나라는 당파싸움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터라 고국의 현실에 크게 실망하신 거죠. 그래서 고모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효자 언니도 대학(서울대 조소과)을 졸업한 후 곧 미국으로 갔고요.” 김인씨와 안미생씨는 슬하에 딸 김효자(64)씨를 뒀다. 효자씨의 이름은 백범이 직접 지어줬다고 한다. 김신 회장은 1960년대 주(駐)대만대사 시절 효자씨와 함께 생활하며 그를 친딸처럼 아꼈다. 효자씨는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다. 적에서 동지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의 꽃’으로 불리며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동생, 조카 등 일가 40여 명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안 의사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지만 이들은 김구 선생의 든든한 독립운동 파트너였다. 하얼빈 의거 이후 안 의사 일가는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만주 등 해외로 뿔뿔이 흩어졌다. 1910년 봄 온 가족을 이끌고 망명길에 오른 안정근은 1919년 늦가을, 중국 상하이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 활동을 시작하며 백범과 만나게 된다. 임시정부 내무차장과 대한적십자회 최고 책임자로 활동하는 한편, 임시정부 북간도 파견위원으로 선임돼 독립군 통합운동에 힘썼다.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것도 그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다. 안공근은 1925년 이후 15년간 백범과 동고동락하며 그의 최측근 동지로 활약했다. 1931년 11월 한인애국단 조직, 1934년 낙양군관학교 한인 특별관 설립 등을 주도한 안공근은 백범이 가장 신임하는 핵심참모였다. 1937년 10월 일본이 상하이를 공격하자 안공근은 상하이로 들어가 자신의 가족보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먼저 난징(南京)으로 대피시킬 만큼 백범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동학농민군 접주와 토벌대장. 적으로 인연을 맺은 백범 가문과 안 의사 가문은 독립운동을 통해 동지로 발전하는 ‘운명적 변화’를 겪었다. ▼ 안중근 의사의 직계 자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안기수 : “안 의사의 장남(안분도)은 6세 때 일제의 음모로 중국에서 독살됐다고 들었습니다. 안 의사의 부인인 김아려 여사도 1946년 해방된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상하이에서 숨을 거두셨고요. 안 의사의 차남 준생씨는 중국에서 큰어머니(정옥녀)와 결혼하셨고, 1950년대 초반 부산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큰어머니께서 ‘조국이 통일되면 돌아오겠다’며 웅호 오빠, 선호 언니, 연호 언니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하셨어요. 웅호 오빠는 미국 버클리대에서 의학박사를 받은 후 심장병 전문의로 일했습니다. 최근에는 많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어요. 미국에서 자란 오빠는 우리 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몰라 가슴이 아파요. 선호 언니는 돌아가셨고, 연호 언니 역시 미국에 살고 계십니다. 안 의사의 딸인 현생 고모는 돌아가셨고, 그분의 딸인 황은주·은실씨는 각각 한국과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 안 의사의 후손 중에는 해외에 계신 분이 많군요. 안기수 : “작은할아버지(안공근) 자손들은 북한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분의 딸인 연생 언니는 현재 파나마에 살고 있어요. 안 의사의 사촌형제인 봉근 할아버님은 일제 치하 당시 독일로 건너갔어요.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독일 방송에 손 선수가 일본인이라고 소개되자 방송국으로 찾아가 손기정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정정한 사람이 바로 그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현재 고국을 떠나 있는 현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념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고국에 발붙이고 살기 어려웠던 사정은 백범 일가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6월26일 백범은 서울 중구 필동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김구 선생이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던 경교장은 현재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백범 서거 후 유가족은 경교장에서 쫓겨났다. 김미씨는 당시 자신의 부모가 겪은 고통을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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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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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가계도 안두희 죽음 막은 백범 며느리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저희 가족은 경교장에서 쫓겨났어요. 국민장을 치른 후 할아버지 유해가 효창공원에 안장됐는데, 우리 가족은 얼마간 그곳에 성묘조차 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부가 일일이 체크할 정도였어요. 유해가 안장될 무렵 효창공원에 연못이 있었는데, 나라에선 ‘터가 좋다’는 이유로 연못을 메워버렸다고 합니다. 그 위에 들어선 것이 효창운동장이에요.” 백범 암살의 배후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과 김창룡 특무대장이 범인 안두희의 뒤에 있었다는 것이 기록과 증언을 통해 확인됐을 뿐이다. 민주사회당 국회의원을 지낸 고정훈씨가 광복 후 미국 정보기관 CIC의 통역 겸 판단관으로 일했는데, 그는 4·19혁명 직후 “백범 암살의 최고책임자는 신성모”라 내용의 보고서를 봤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관련됐다는 물증은 없다. “백범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이 대통령측이 백범 일가를 탄압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김미씨는 “그건 역사가의 해석에 맡긴다”며 말을 아꼈다. 백범이 서거할 때 군인이던 김신 회장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멀리 파견 근무를 떠나야 했다. 김미씨는 부친인 김신 회장의 생애를 들려주며 애틋한 심경을 내비쳤다. “아버지께선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1940년대 중반 미국에서 비행기 조종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기술을 6·25전쟁으로 고국에서 처음으로 쓰게 돼 굉장히 가슴 아파하셨어요. 아버지께선 전쟁에 나가길 원치 않으셨지만 젊으면서도 비행시간이 제일 긴 비행사였기 때문에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독감을 심하게 앓던 어느 날, 어쩔 수 없이 비행에 나섰다가 한쪽 귀의 청력을 완전히 잃어버리셨지요.” 1940년대 말 유일하게 미군 전투기를 조종했던 김신 회장은 공군 창설 멤버로 활약하며 훗날 공군참모총장에 올랐고 이후 대만대사, 교통부 장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회장의 부인인 고 임윤연 여사는 백범의 유품을 보존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임 여사는 “언젠가 시아버님을 다시 생각할 분이 계실 것”이라며 백범의 데드마스크 제작을 주도했다. 현재 백범기념관 2층에는 백범의 얼굴을 본뜬 데드마스크가 전시돼 있다. 김미씨는 “어머니의 선견지명 덕분에 할아버지의 실물과 가까운 동상을 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미씨는 김구 선생이 저격당한 상황에서 담대하게 대처한 임 여사의 일화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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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의 모친 곽낙원 여사의 환국 의지와 상하이 생활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5년 11월6일자 기사. “경교장에 있던 사람들이 할아버지께 총을 쏜 안두희를 붙잡아 죽이려고 몰려들자 어머니께서 온몸으로 그들을 막으셨대요. ‘이 사람이 살아 있어야 살해 배후를 찾고 증거를 남길 수 있다’며 흥분한 사람들을 설득하신 거죠. 할아버지께서 저격당하던 날 입었던 피 묻은 옷도 어머니께서 고이 간직해오셨습니다. 어머니께선 독립운동가의 며느리로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탓인지 제가 열네 살 때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동아일보와 백범家의 인연 김미씨는 백범 가문과 동아일보의 오랜 인연을 들려주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대부터 백범은 물론 그의 가족 근황에도 관심을 갖고 보도했다. 신문은 백범의 부인 최준례 여사가 상하이에서 차남(김신)을 낳은 후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 1924년 계단에서 실족해 사망했다는 소식은 물론, 최 여사의 장례식과 그의 일생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했다. 동아일보는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와 김신 회장의 귀국에도 도움을 줬다. “할머니(최준례)께서 돌아가신 후 증조할머니(곽낙원)께서 아버지를 힘겹게 키우셨습니다. 일제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배후로 할아버지를 지목하고 현상금을 걸었어요. 할아버지께서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은 끼니조차 제대로 못 잇는 고통을 겪었죠. 중국에서 먹고살기가 어려워지자 증조할머니께서 아버지를 데리고 인천항으로 귀국하셨어요. 인천에서 여비가 떨어진 증조할머니께서 동아일보 인천지국에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해서 서울로 갈 여비와 차표를 받았어요. 또 증조할머니께서 서울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자, 본사 관계자가 두 분을 황해도 사리원까지 보내드렸다고 합니다.” 백범의 혈육 중 유일하게 생존한 김신 회장은 3남1녀를 두었다. 장남 김진(57)씨는 동서통상과 글로볼씨스텍 대표이사를 거쳐 1998년 대한주택공사 감사를 역임했고, ‘참여정부’ 들어서는 대한주택공사 사장에 임명됐다. 차남 김양(53)씨는 지난해 주(駐)중국 상하이 총영사에 임명되면서 백범 집안은 4대째 상하이와 인연을 맺었다. 광고인인 3남 김휘(51)씨는 나라기획 이사와 멕켄 에릭슨 상무를 거쳐 현재 광고대행사 ㈜에이블리 대표를 맡고 있다. “안중근·정근 유해 송환되길” 김신 회장의 막내딸 김미씨의 남편인, 김호연 빙그레 회장은 백범의 손녀사위라는 인연으로 독립운동가 추모사업을 활발하게 벌여오고 있다. 그는 사재 220억원을 출연해 설립한 김구재단을 통해 매년 150여 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으며, 장인이 회장인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서 부회장을 맡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에 ‘김구 포럼’을 만들었고 터프츠대에 ‘김구 석좌교수’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김 회장은 후손 없이 서거한 이봉창 의사 기념사업회도 후원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재계 인물로는 드물게 지난해 국가보훈처가 주는 보훈문화상을 수상했다. 후손들이 주축을 이룬 백범의 추모사업을 전해 들으며 안기수씨는 부러움 섞인 표정을 지었다. 안중근 의사 일가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는 그저 안 의사 개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이다. 동생 안정근은 거의 조명되지 않았다. 홍범도 장군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소설가 송우혜씨가 안정근의 활약상을 발견하고 ‘독립운동가 안정근’에 대해 쓴 논문이 유일하게 발표된 연구자료다. 안정근은 1987년이 돼서야 독립장 서훈을 받았다. 그의 차남 안진생 전 미얀마대사가 “아버지는 후손들 연금 받으라고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다”라며 서훈 신청을 미뤘기 때문이다. 안 전 대사는 사망하기 전까지 단 1년간 독립유공자 자제로 보훈연금을 받았다. 1973년 개정된 독립유공자법에 따르면 광복 이전에 사망한 독립유공자는 손자들까지 연금을 받게 돼 있고, 1945년 이후 사망자의 경우엔 직계 자녀에게만 연금 혜택이 돌아간다. 안기수씨는 어머니 박태정 여사(안진생 전 대사의 부인)를 모시고 서울 도봉구 창동의 월세 아파트에 살고 있다. 1980년 외교안보연구원 본부 대사로 일하던 안 대사가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 해직된 충격으로 쓰러지면서 박 여사는 안 대사의 치료비를 마련하고자 서울 여의도 아파트를 팔았다. 안 대사가 8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사망하면서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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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안진생씨가 콜럼비아 대사로 근무하던 시절 로마교황청 대사와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안진생 대사, 안기려씨, 로마교황청 대사, 안기수씨, 박태정 여사. 외교관 부친을 따라 어린 시절을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자이레(현 콩고민주공화국), 콜롬비아 등지에서 보낸 안기수씨는 한때 프랑스어 번역가로 활동했고, 1988년 서울올림픽 때에는 국제 레슬링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보험사 파이낸셜 컨설턴트 일을 시작한 것은 2004년. “전공을 살려 번역 일을 하는 것이 낫지 않냐”고 묻자 그는 “파이낸셜 컨설턴트는 정년이 없어 좋다. 프랑스어 번역은 수요가 그리 많지 않다”고 답했다. 그는 “부모님은 남에게 베풀며 청렴하게 살아오셨다”며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나라에 기여하셨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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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조카딸이며 백범 김구 선생의 며느리인 안미생 여사. 안기수씨의 간절한 바람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물론 상하이에서 사망한 조부 안정근의 유해를 발굴해 한국으로 송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에 속만 태울 따름이다. “할아버지께서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 투옥된 형(안 의사)의 옥바라지를 하느라 애썼습니다. 안 의사가 동지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것을 맹세하며 약지를 잘랐는데, 그 끊어진 토막을 할아버지께서 줄곧 보관했다고 합니다. 안 의사는 처형되기 한 시간 전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안공근)와 마지막으로 면회하면서 ‘내가 죽은 뒤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에 묻어달라’고 하셨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안 의사의 유해를 모시고 조국에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애를 썼지만, 중국이 공산화하는 등 여건이 어려워지면서 미처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뇌암과 싸우다 1949년 이국 땅 상하이에서 돌아가신 뒤 그곳에 묻히셨죠. 묘소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김미씨에 따르면 백범은 1948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당시 노동당 부위원장이던 김일성에게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을 공식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이 “남북통일을 이룬 뒤 본격 추진해보자”고 답해 발굴 작업은 기약 없이 미뤄지고 말았다는 것. 1970~80년대에 북한은 안 의사가 황해도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연고를 주장하면서 안 의사 유해 송환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남한에서는 1992년 한중 국교 수립 이후 민간 차원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교도소장 딸의 증언 등을 확보해 감옥 뒷산에서 매장터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냈다.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 다행스러운 일은 오는 20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2010년 순국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남북한이 함께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의사의 묘역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 다롄(大連)시 뤼순구 7000여 평을 대상으로 현장 조사를 한 후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다. 국가보훈처는 내년 이 사업에 10억원을 지원하며 ‘안중근 의사 유해 남북한 공동 발굴단’ 등 민간단체와 역할을 분담한다. 이 소식에 안기수씨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사회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온 김미씨는 “남은 생애 동안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고 했다. 그의 꿈은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여성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유관순 누나’만 떠올리는 현대인에게 그의 저작은 소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다. “고국을 떠나 독립운동에 몸바친 여성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남성 독립운동가들만 명성을 얻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증조할머니 곽낙원 여사, 할머니 최준례 여사, 큰어머니 안미생 여사도 남성의 그늘에 가려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입니다. 저는 아버지와 함께 중국에서 성장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요즘도 종종 찾아뵙고 있어요. 그분들의 발자취도 모두 역사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친 김미씨와 안기수씨는 백범기념관을 둘러봤다. 김미씨는 “다음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엘 함께 갔으면 좋겠다”며 안기수씨의 손을 꼭 잡았다. 한국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인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었다. (끝) <출처 / 신동아 200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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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5/19 [18:52]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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