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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고픈 안중근 가족사 ‘연극 나는 너다’
<공연> 안중근의 둘째아들 안준생의 삶
 
단지12 닷컴   기사입력  2010/08/14 [12:43]
숨기고픈 안중근 가족사 ‘연극 나는 너다’
 
영웅의 아들로 태어나, 영웅의 운명을 타고난 남자. 그래서 더욱 가혹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아버지를 원망한다. “당신이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켜낸 그 순간 남은 가족은 갖은 고초를 겪어내야만 했다”며,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서러움을 쏟아낸다. 그의 이름은 안준생.
 

안중근 의사의 막내아들인 그를 역사는 친일파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안준생 자신은 친일파가 아니라고 호소한다. 물론 들어주는 이도 없다. 그의 머릿속에 자신의 아버지인 안중근에 대한 기억은 없다. 너무 어린 나이에 떨어져 지내야 했던 그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전해들은 것이 전부다.
 

단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던 그 남자를 모든 이가 영웅이라고 받들고 이해하려든다. 반면 그런 아버지를 뒀다는 이유로 온갖 여파를 겪으면 자라야 했던 안준생은 아버지가 늘 못 마땅하기만 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환경. 아버지의 그늘에서 늘 부족한 존재로 손가락질 받아야 했던 영웅의 아들은 오늘도 자신의 운명을 탓하고 그런 운명을 준 아버지를 외면한다.
 
◆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린 받은 안준생의 삶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안준생의 아버지인 안중근(송일국 역) 의사. 대한민국의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 이었으며, 대한의병 참모중장인 그는 1905년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을사조약에 저항 운동을 펼치고, 1903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하는데 성공한다.
 

3발의 총성과 함께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에게 일본은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사형을 집행하기 이른다. 하지만 안중군 의사는 한국의병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내린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자 평화의 교란자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처벌이라고 외쳤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전행을 했고, 참모중장으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 받을 의무가 없다”며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 또한 묵살됐다.
 

역사에 기록된 안중근 의사가 거론한 이토의 죄명은 총 15가지 ▲명성황후 살해 ▲1905년 11월 한일협약 5개조 체결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7개조 체결 ▲양민 학살 ▲이권 약탈 ▲동영평화 교란 등에 달하지만 일본은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일방적으로 내리고 그해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형을 집행한다.
 

이 같은 내용은 안중근 의사에 관한 다큐와 관련 영화를 통해 자주 언급되던 내용이다. 그럼에도 안중근 의사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3명의 자녀와 아내가 있다는 내용 그리고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히토 히로쿠니가 복수를 위해 안중근 의사의 자녀를 이용한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연극 ‘너는 나다’는 경술국치 100년이 된 해이자 안중근 의사 서거  100년을 맞아 마련된 역사극 이라는 의미도 담겨있지만, 그 보다는 안중근 의사의 그늘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주변 사람과 가족 그리고 친일파라고 역사에 기록된 막내아들 ‘안준생’에 대해서 집중 조명한 공연이다. 특히 히토 히로쿠니로 인해 친일파가 되어버린 이후가 주요 내용이다.
 
 

◆ 모두가 외면한 안준생의 삶은 친일파, 변절자, 배신자로 요약되고
 

안중근 의사에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히토 히로쿠니는 이후 총독이 되어 창씨개명, 일본말 사용, 조선민족문화말살정책을 통해 조선을 더욱 탄압하기에 이른다. 물론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죽게 한 안중근 의사의 가족에 대해서도 보복의 날을 갈았다. 그리고 그 희생양이 안중근의 막내아들인 안준생이다.
 

연극 ‘나는 너다’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도 이 부분이다. 공연 초반부터 안준생은 모두에게 친일파, 변절자, 배신자라는 3가지 단어를 통해 알려지면 안 되는 인물로 묘사된다. 심지어 자신의 엄마까지도 숨기고 싶은 자녀로 나오는데 이후 행각에 이유가 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에게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일본은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박문사(구 보리사)라는 사찰을 세운다. 문제는 안중근의 아들인 안준생이 박문사에 등장해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안중근의 위패를 모시고 추선 법요를 거행한 것이 알려지면서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안준생은 죽은 아버지의 죄를 자신이 속죄한다는 식의 발언을 했으며, 다음날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를 만나 사죄하면서 일본의 선전도구로 이용당하게 된다. 이 내용은 백범 김구 귀에 들어가게 되고, ‘백범일지’에 안준생을 비판하는 내용이 거론될 정도로 분노를 산다.
 

“1945년 11월.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 백범일지 中
 

연극 ‘나는 너다’에서 공연 시작부터 안준생의 삶은 혼돈의 연속으로 묘사된다. 연극 속 안준생은 “나의 아버지가 안중근이기에 자신이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영웅의 아들도 영웅이여야만 했는가!”로 반론하는 안준생. 하지만 역사에 서술된 시각으로 안준생의 행각을 평가하면 안준생의 말은 핑계로만 들릴 뿐이다.
 

◆ 역사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다.
 

매년 이맘때만 되면 반복되는 안중근 의사에 관한 논쟁.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3발의 총성과 함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바쳤다는 것에 불과하다.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된 사형 집행 이후 안중근 의사의 주검은 아직도 수습되지 않고 있다. ‘나라를 찾거든 고국에 묻어 달라’던 안중근 의사의 간절한 바램을 아직도 후손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변절자로 매듭지어진 안준생 또한 연극에서는 인간답게 살기를 원했던 개인으로 나온다. 버려져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 살아남은 죄가 뭐가 나쁜 것이냐고 관객에서 되묻고 있다. 과연 그러한 상황에서 동일한 선택을 하지 않을 이가 몇 이나 되겠냐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안준생은 “나라가 망했으면 망한 대로 살고, 나쁜 놈이 나와서 설치면 구경하면 되는 거지”라며 자포자기 심정과 원망이 섞인 대사를 내 뱉는다.
 

영웅의 아들로 태어나 영웅으로 살아야했던 남자의 이야기. 하지만 안중생의 인생은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과 세 살 때 부친을 잃고 혼자 살아남아야 했던 그에게 역사는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였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지만 최소한의 대우도 보장되지 못했던 사회에서 일본은 안준생을 거둬들었고 정치선전의 도구로 이용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함부로 그에게 손가락질 하면 안되는 이유다.
 
배타뉴스/ 김현동 기자 (press@onstyle.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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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0/08/14 [12:43]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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