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0주년입니다. 동족끼리 총뿌리를 겨눈 6.25전쟁을 어떠한 시각으로 볼 것인가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민족적 비극으로 수 백만명의 희생자를 낸 6.25전쟁의 상흔은 전쟁이 끝난,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민족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전쟁이 왜 일어난는지 그 원인에 대한 진지한 평가 보다는 전쟁 그 자체의 처참함이 부각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순국선열들의 시각으로 볼때 6.25 전쟁은 참으로 한심한 전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끼리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장군의 시각으로 볼때도 남북분단과 6.25 전쟁은 참으로 억울하고 한심한 전쟁일 것입니다. 6.25, 60주년을 맞아 다시는 우리민족끼리의 전쟁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가슴에 새기면서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와 민족화해 추구 만이 안중근 장군의 민족정신 구현이라는 생각입니다. 25일 오후 안중근 창년아카데미 정광일 대표와 함께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는 안중근 장군의 하얼빈 작전 동지 우덕순 선생 묘를 찾아 참배했습니다. 우덕순 선생은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톡크에서 안중근 장군과 함께 이등박문 척살을 목표로 하얼빈 행 기차를 탄 하얼빈 작전 동지입니다. 당시 우덕순 선생은 하알빈 역 이전 기차 역인 채가구 역에서 잠복 했고 안중근 장군은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이 탄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이등박문이 탄 기차가 채가구 역에서 정차할 것을 대비한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등박문이 탄 기차는 채가구 역에서 정차하지 않고 하알빈 역으로 갔고 거사는 안중근 장군 몫이 된 것입니다. 거사후 공범으로 체포되어 안중근 장군과 함께 재판을 받고 여순감옥에서 5년 동안 옥고를 치룬 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후 귀국, 혼란한 시대에서 정치에 참여했다가 6.25 전쟁이 일어난 그 해, 9월 26일 서울에서 북한군에 의해 처단 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민족전쟁에 독립운동가가 희생된 것입니다. 우덕순 선생 묘 앞에서 민족화합 운동, 통일운동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것이 수 많은 애국선열과 안중근 장군, 우덕순 선생의 유지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 국립 서울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59번)에 잠든 우덕순 선생 묘, | |
▲ 묘비 뒷면에는 우덕순 선생의 약력이 적혀있습니다. © |
▲ 우덕순 선생은 6.25 남북전쟁을 어떻게 평가 할까? 한심한 전쟁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배에 동행안 안중근청년아카데미 정광일 대표가 묘비 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습니다. © | | | <다음은 우덕순 선생의 약력입니다> 본관은 단양(丹陽), 호는 단운(檀雲)이며, 이명(異名)은 연준(連俊)이다. 충청북도 제천(堤川) 출신으로, 서울 동대문 부근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국외에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투쟁하기로 결심하였다. 그해 겨울에 러시아 연해주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동지들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1907년 안중근(安重根)·이범윤(李範允)과 함께 의병 양성에 힘썼다.
▲ 1909년 3월 23일, 하얼빈 거사 3일전 안중근과 우덕순, 유동하 이들은 하얼빈 공원을 거닐며 작전을 모의하고 공원밖 이발관에서 머리를 손질하고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 | 1908년 300명의 정예 용사와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함경북도 경흥(慶興)·회령(會寧) 일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교전하다 체포된 뒤 7년형을 선고받고 함흥 감옥에서 복역중 탈출하였다. 1909년 봄 노우키에프스크[연추(煙秋)]에서 안중근·김기열(金基烈) 등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고 결사보국을 다짐하였으며, 그해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안중근을 만나 국권피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는 거사에 동참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지역을 순방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하여 우덕순은 차이자거우[(蔡家溝] 역에서 대기하고, 안중근은 하얼빈[哈爾濱] 역에서 대기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는 차이자거우 역을 그냥 지나쳐 하얼빈 역에서 정차하였다. 이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데 성공한 뒤 공범자로 체포되어 뤼순[旅順]에서 함께 재판을 받고 이듬해 징역 3년 형을 언도받았으며, 옥고를 치르던 중 함흥 감옥에서 탈출한 사실이 드러나 2년의 형량이 추가되어 1915년에 출옥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에서 교육·종교 사업에 종사하며 독립운동에 힘썼고, 광복 후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한인민단(韓人民團) 위원장으로서 아들 대영(大榮)과 함께 동포들의 본국 수송에 힘썼다. 귀국한 뒤에는 1948년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 최고위원으로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그해 9월 26일 북한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68년 9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묘비번호 59)에 안장되었다.< 이진학 / 안중근 장군 동상건립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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