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바로 안중근의 하얼빈 작전 100주년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독립특파대장 안중근'은 치밀한 특공작전으로 일본제국주의 대륙침략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를 사살합니다.
안중근의 이같은 작전성공은 그 후 중국인과 조선인들에게 항일투쟁의 용기를 불어넣게 됩니다. 또한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것입니다. 따라서 안중근장군의 1909년 10.26 특공전전은 그 후 수행되었던 김좌진장군의 청산리대첩 등 수많은 항일독립전쟁의 출발이 되는 셈입니다.
안중근청년아카데미 초기에 미숙한 저를 안중근청년아카데미 상임지도위원장이라는 직책에 위촉한 것은 아마 남성적인 성격이 강한 안중근정신을 화합의 시대 21세기에 필요한 부드러움을 접목 시키려는 의도 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 시도한 일은 안중근의사라는 호칭에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제라도 인간 안중근의 신분을 규정하는 단어를 ‘의사’가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 으로 바꿔야합니다. 그리고 통칭을 ‘안중근장군’으로 호칭하여 그분이 본래 가졌던 신분을 찾아줘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약간의 반론이 있습니다. 막연하지만 감성적으로 “장군보다 의사라는 호칭이 명예스럽게 느껴진다.” “오랫동안 사용한 호칭을 바꾸기가 쉽겠는가?” “정식군대가 아니었다.” 정도인데 이는 의사라는 호칭을 유지해야할 논리적기반이 약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호칭이 더 명예스러운가는 주관적영역입니다. 오래 사용한 호칭을 바꾸기가 어렵다는 논리는 이해할 수는 있으나 당위성은 없습니다. 정식군대라는 주장은 조선조에 있었던 수많은 의병활동의 長을 장군으로 호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동안 안중근청년아카데미는 호칭변경을 꾸준히 주장하며 공식행사에서 장군으로 호칭해왔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사회적 반향이 있어 학계는 물론, 아직은 일부지만 주류 언론에서도 장군으로 표기하는 변화가 있습니다. 때문에 이 발제에서 왜? 장군이여야 하는가를 적시하는 것이 의미가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압축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본인이 그렇게 원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은 엄연히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직위를 밝혔고, 이토의 사살이 군사작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안중근은 1908년 전후해 당시 항일운동 본거지였던 러시아 연추에서 무장 독립군을 결성해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해 조국독립을 쟁취한다는 취지로 독립군을 조직하고 여러 차례 국내진입 작전을 펼쳐 전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순국직전까지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이라는 글로 자신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친다는 결연한 군인정신을 유언한 것입니다.
둘째, 국제법상에 문제가 있습니다. 안중근을 전쟁포로에서 테러리스트로 전락시킨 것은 일본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안중근을 의사로 규정하면 우리민족에서는 영웅일 수 있으나 세계인에서는 개념이 모호해질 뿐만 아니라 반인륜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장군은 하얼빈작전 이후 일제법정 재판과정에서 일관되게 자신의 신분을 '대한의군 참모중장 독립특파대장 안중근'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분을 민간인이 아닌 의군, 독립군, 즉 군인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셋째, 하얼빈거사 전반을 조망하여 우덕순/ 류동화/ 조도선 요원들의 역할 분담에 의한 지휘명령체계 확보, 전술적 작전계획 수립, 집행, 체포시 주장 등을 검증하면 이는 분명한 군사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간략한 논리보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사표로 삼고 존경하는 위인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주장한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왜곡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더욱 부끄러운 점은 당시 30세 약관의 젊은이가 파악해냈던 정도의 국제법이나 명분확보 전략을 읽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넷째, 그동안 우리의 눈을 막고 사고를 제한한 여러 요인들 중에 친일사관이 있음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방식은 참으로 전략적입니다.
일본의 征韓論은 일본전체가 동의한 전략이 아닙니다. ‘大政奉還’을 끌어낸 메이지유신은 ‘사이고 다까모리’가 대표하는 ‘큐우슈세력’과 ‘기도 다까요시’가 대표하는 ‘조슈세력’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두 세력 간의 다툼은 치열했고 이는 많은 정책에서 충돌해왔습니다.
정한론도 대표적으로 충돌했던 정책이었습니다.
결국 ‘세이난전쟁’이라는 내전을 통해 어느 정도는 세력균형이 깨졌으나 해군과 육군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2차 대전 종전까지 갈등해왔습니다. ‘기도’의 서생이었던 이또는 조슈세력의 2인자로 성장하여 조선, 만주침략정책을 주도해왔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지만 당시 일본에는 이를 반대하는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료를 보면 “일본에도 양심이 있었구나.” 라고 평가할만한 안중근과 관련된 자료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는 안중근장군의 의기에 매료된 일본인들이 많았다기보다 이러한 일본내부의 세력 갈등이 원인으로 작용하여 장군의 거사, 인물, 재판 등의 평가에 있어서 우리 측에서 보면 긍정적적인 반응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이 해방 후 교묘하게 우리를 현혹시키고, 일본내부갈등의 타협안인 ‘의사’라는 호칭이 우리에게 주입되게 됩니다. 이제는 떨쳐야할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2등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동력은 1등을 한 특정인 아닙니다.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동력인 것입니다.
때문에 장군의 하얼빈대첩은 안중근 혼자만 조명되어는 안 됩니다. 작전에 직접 투입되었던 우덕순, 류동화, 조도선, 또한 배후지원을 한 김성백도 함께 기억되고 평가받아야합니다. 안중근이 의사로 고착될 때는 이분들의 행적이 역사에서 조명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도 시급히 호칭을 바꿔야합니다.
장군의 거사 100주년을 맞아 많은 행사들이 치러지고 이를 통해 안중근정신을 추모하고 배우자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젊은 세대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는 청년 안중근의 정신은 무엇이며, 어떻게 배워야하며, 어떻게 알려야 할까요?
흔히 말하는 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애국심을 배워야 할까요? 아니면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무모함을 배워야 할까요? 청년 안중근의 정신이 고결하고 탁월했어도 의외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에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안중근청년아카데미는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판단하는 안중근의 정신과 행위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첫째, 당시 동양평화를 위협하는 군국주의적 일본정책의 핵심에 이또가 있으며, 이를 세계에 효과적으로 알리는데 이또를 군사적으로 사살해야 한다는 전략적 사고.
둘째, 이를 즉각 실천에 옮기는 용기.
셋째, 작전 이후에 동양평화론을 주창하면서 후세에 귀감이 될 명언들을 끊임없이 생산한 지구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될 수 있는 안중근정신이 왜?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인가도 함께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당시를 슬기롭게 풀어간 안중근의 정신이 추모나 숭모의 범위를 넘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또한 실용적으로 적용 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2009년 10월 26일
안중근청년아카데미 지도위원장 이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