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그것은 분노의 발로였다. 그것은 정의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평화를 갈구하는 한 청년의 처절한 절규였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주의와 구국의 투쟁을 넘어선 하늘나라 저편의 진리를 이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거룩한 몸짓이었다.
이는 단지 안중근 운동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청천벽력(淸天霹靂) 경천동지(驚天動地)!!!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지고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리도다.
1909년 10월26일, 바로 이날은 세상이 깜짝 놀랄 청천벽력 경천동지의 큰 사건이 터진 날이다.
소위 대일본제국의 총리대신이란 자가 위풍당당하게 세계의 대강국 러시아 군대를 사열하는 역사적인 현장에서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전광석화 같은 찰나에 누군가가 쏜 총알을 가슴에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진 것이다.
장소는 중국 만주 흑룡강성 하얼빈 역 광장. 때는 아침 9시 30분.
피살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범은 이토를 저격한 직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흔들며 큰소리로 만세삼창을 외쳐댔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그러므로 그는 한국인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가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로 공통으로 통하는 "대한국 만세"를 삼창했으니절대로 무지몽매한 일개 건달은 아님이 분명해 졌다.
그 저격범, 혹은 살인자 혹은 암살자로 지칭되는 한국인 안중근은 누구이며 그가 무엇때문에 그런 놀라운 일을 저질렀는가?
그 문제에 대하여 사건 발생 즉시 일본은 물론이고 당시의 한국과 러시아 중국 또한 유럽 열강과 미국 할 것 없이 거의 전세계가 해답을 찾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으니 그 해답은 당연히 그 즉시 나왔을 법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일본이 찾아 낸 해답은 너무나도 엉터리였다. 한국이 찾아낸 해답도 엉터리였다. 안중근이 신앙하는 천주교회가 찾아 낸 해답도 엉터리였으니 그밖에 어느나라 어느사람이 올바른 해답을 찾아내었으리오!!
우리는 지금도 안중근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나로 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안중근의 사상과 거사의 진의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제 필자는 먼저 안중근의 정체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안중근은 어릴때 아명이 응칠(應七)이었고 하얼빈 거사 직후에 일본헌병에게 인계되어 여순 법정에서 조사받을 때도 이름을 안응칠로 썼다. 그러니 안중근은 안응칠과 동일인이다.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기슭에서 태어 났고 나중에 신천군 신계동이라는 산골짜기로 이사를 하여 동네 아이들과 놀기도 하고 8, 9년동안 한문공부도 하고 사냥총을 메고 말타고 사냥도 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평범한 소년 안응칠이었다.
16세에 거기서 결혼을 하여 살던 중 동학난을 만나 어린 나이에 동학난 토벌 선봉장으로 나가 적을 격퇴시킨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안응칠이 동학난 토벌에 자원한 이유는, 동학난 때문에 조정이 위태로와 청국군과 일본군이 국내에 지원군 명목으로 들어와 마침내 청일전쟁으로 비화하고 장차 러시아와도 개전할 위험이 다분하여,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의병을 조직하여 국가를 평온케 함은 그의 애국충정의 당연한 발로였기 때문이다. 이제 애국지사 안응칠이라 해도 좋겠다.
그러나 조정은 그를 실망시켰다. 조정의 부패한 관리들이 민초들의 구국충정을 짓밟는 처사에 안응칠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행히 황해도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의 덕분으로 천주 즉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은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믿는 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분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이에 안중근은 독실한 예수교인 즉 세례명 토마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독실한 천주교인 토마 안중근으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독실한 천주교인 토마 안중근이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을 필두로 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조국이 망해가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안중근도 평온한 신앙생활을 그대로 지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우선 조국을 구해야 했다. 프랑스와 바티칸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조국을 구할 방도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 프랑스 신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조국 백성들의 교육에 천주교회가 반대하자 안중근은 개탄하기를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 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하고 프랑스 말 배우던 것도 그만두고 홀로 서기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에 안중근은 스스로 학교를 두 개나 설립하여 재주가 뛰어난 청년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제 교육자 안중근이다.
1907년 일본은 한국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국채의 보상을 요구하며 한국에 일본 관리를 파견하고 군대를 해산하고 한국에 일본군을 주둔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우리나라는 대구에서 서상돈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고 안중근은 국채보상운동 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할동하는 한편, 1908년 6월부터는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의병대장 김두성의 휘하에 들어가 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 일본군과 두만강 유역에서 전투를 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제는 독립운동가 겸 의병장군 안중근이다.
1909년, 함께 의병 활동을 하던 동지들과 함께 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 즉 3년이내에 제국주의 침략의 원흉인 일본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면 자결한다는 비밀결사였다.
이때 안중근의 신분은 여전히 의군 참모중장이었으니 단순히 평범한 민간인 신분의 의사(義士) 안중근이 아니라 한국군대를 대신하는 의군 장군 안중근이라 함이 옳다.
혹자는 안중근을 민간인을 암살한 테러리스트라고 평하기도 한다. 아니 대부분의 일본 국민은 우리 한국의 안중근을 자신들의 조국 일본의 영웅 이토를 비겁하게 숨어서 암살한 테러리스트 내지 암살범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테러리스트의 조건은 첫째 전투원 신분이 아닌 민간인 신분일것, 둘째 무고한 민간인을 공격함으로써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행위를 하는 자일것, 셋째 전쟁법 즉 국제 인도법을 준수하지 않고 국제인도법의 적용대상에서 제외되는 자일 것이다.
그런데 안중근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오사마 빈 라덴과 같은 민간인이 아니다. 또 민간인을 공격하여 살해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한 전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안중근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같은 국정책임자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군대도 없는 당시의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수행하는 의군 참모중장이라는 군인 신분으로서, 적군의 수괴에 대한 공격을 위한 주도 면밀한 전략작전을 전개한 전투원이다.
또 그는 그간의 모든 전투에서 국제인도법을 숙지하고 그 내용을 준수해 왔으며 포로도 인도적으로 대우한 덕장(德將)이었다.
이러한 안중근 장군을 어떻게 일개 파렴치한 암살범, 닌자, 흉한, 테러리스트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은 그의 평화사상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한 나라 내부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국제평화 전세계 인류의 평화를 그토록 절실히 피력할 수 있자면 안중근은 본품성이 호전주의가 아닌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동양평화론에서 단순히 평화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인류공영을 위한 실용적인 여러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 한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아니 전 인류의 공통적 번영이 안중근의 염원이었다. 두루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함이었다. 바로 홍익인간사상이 안중근의 궁극적 사상이다.
이상이 안중근의 일대기를 통해서 본 안중근의 정체성이다.
즉, 안중근은 어릴때는 평범한 소년 안응칠, 커서는 애국지사 안응칠, 독실한 천주교인 토마 안중근, 교육자 안중근,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병 내지 의군장군 안중근, 평화주의자 그리고 홍익인간주의자 안중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안중근의 평소 품성은 어떻했는가?
안중근이 14세때 조부 (안인수)가 돌아가시매 평소 조부의 사랑을 잊지 못해 너무나 슬퍼 까무러치기 까지 했으며 그로인해 병까지 얻어 반년 뒤에야 겨우 회복했다 하니 안중근의 품성이 몹시 다정다감했음을 알 수 있겠다.
또 사나이로서 친구들과 더불어 기생집도 드나들었으나 본시 주색잡기를 일삼지 않고 오히려 기생들을 질책 훈계하여 좋은 배필을 만나 짝을 짖기를 권한 것을 보아 안중근의 인륜을 중시하는 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불원천리 말을 달려 좋은 친구들을 찾아 다녔다 하니 이는 안중근의 적극적인 사교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한 안중근이 평소 불의함을 참아 넘기지 못하는 정의의 투사임은 여러 경우에 그가 못된 관리들을 상대로 당당히 맞서 억울한 양민들의 권익을 보호해 준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
또 그는 여러 번 여러 사람에게 부당히 무수히 구타를 당했다. 한번은 홍신부에게 두드려 맞고, 또 한번은 의사에게, 또 한 번은 마부에게 말채찍으로 두들겨 맞기도 했다.
어느 경우나 안중근의 바른 말 때문에 상대방이 화를 내어 폭행을 한 것이지 안중근의 잘못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안중근은 맞으면서도 같이 대들지 않고 꾹 참았다. 이것을 보아 그의 크나큰 인내심을 알 수 있다.
한번은 일본군과 전투중에 일본군 포로를 잡아서는 그 포로를 그냥 놓아주면서 무기까지 반환해 주고, 조심해서 가라고 격려해 주었다 한다. 이것이야 말로 인도주의 내지 인간사랑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전투 중에 고통으로 인해 자포자기한 동료 의병에게 하느님을 믿고 힘을 내라고 하면서 천주교 영세를 권했다 하니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하느님을 믿는 그 신앙심은 안중근의 본성이라 하겠다.
한편 안중근은 거사 후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일본 검찰관에 의해 신문(訊問)을 받고 일본재판관에 의해 재판을 받으면서 항상 늠름한 자세를 견지했다. 그야말로 사나이 대장부다움이 그의 변함없는 품성이다.
그리고 보라! 그의 옥중유묵작품들의 필치와 내용을 보라!!!
그 대단한 필력과 기상 그리고 흩어짐 없는 곧은 필치는 이 세상의 어느 누가 가히 안중근에 필적하리오!!!
그 내용의 정의로움과 애국충정 그리고 신앙심과 인도적 정신, 하늘나라에 대한 사모.. 이 모든 것이 안중근의 평소의 품성을 고스란히 표현해 주고 있다.
둘째로 10. 26 하얼빈 거사의 뜻을 밝혀보자.
1895년 10월 8일 이날 밤 우리가 꿈에도 잊지 못할 전대미문의 국치의 사건이 발생했다.
안중근이 16세 되던 해다.
때는 바야흐로 한국에 동학난이 발생하여 조선천지가 난리법석을 떠는 통에 우리 대한제국 고종황제와 흥선 대원군 그리고 고종황제비 민비간에는 누가 보아도 상호간의 알력이 두드러지게 드러났었다.
개화와 수구의 세력 다툼과 암투가 노골화 되어 있었고 동학난의 진압이 조정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이에 전국적으로 동학난 진압의 의병이 조직되고 관군을 도와 동학난 진압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청국과 일본이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여 상호간에 충돌이 일어나는 상황에까지 이르른 즈음, 조만간 한국을 두고 청,일, 러 삼국 전쟁이 개전될 조짐까지 보였다.
그 와중에 1895년 10월 8일 밤, 우리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대한제국 고종황제비 민비께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의 사주를 받고 남의 나라 구중 궁궐 옥호루에 무단 난입한 조폭(낭인)들 손에 무참히 칼로 찔리고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명성황후는 직접 미우라의 지시를 받은 일본 낭인들에 의해 경복궁의 별관 건천궁 옥호루(玉壺樓)에서 살해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이 명성황후 살해사건은 세계인류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너무나 처참하고도 치욕적인 만행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청년 안중근의 심정은 어떻했을까?
'조국은 망하고 있다.천인공노할 반인륜적인 행패가 일본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다. 그 원흉은 이등박문이다. 내가 반드시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아마도 안중근의 심정은 이러한 분노심으로 끓어 올랐으리라.
이때부터 한국의 혈기있는 청년들은 이미 형해화 되어 있는 조선 군대를 대신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설 의병할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의병을 중심으로 일제를 응징할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대포소리가 삼천리를 진동하자 안의사는,
"드디어 때가 왔다, 평화는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오로지 적과의 목숨 건 전투뿐"이라고 판단, 급급히 행장을 차려가지고 가족들과 이별하고 북간도를 향하여 출발했으니 그 해가 바로 1907년이다.
이렇게 이토히로부미를 겨냥한 사투는 처음에는 안중근의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에서 비롯되었다.
안중근 장군은 동지들과 함께 이토 살해 작전을 전개하던 중, 처음의 그 용솟음치던 분노가 점차 정의, 동포애, 군인본분, 인류애로 승화되어, 이토의 살해는 동양평화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거사이며 기필코 작전의 성공을 위해 멸사봉공 살신성인의 희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12명의 동지들이 죽음을 맹세하고 손가락을 끊는 결단식, 즉 단지동맹을 결성한다든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지를 규합하면서 그곳의 동포들에게 구국의 애국심을 고취시킨다든가,
전투중 군인본분의 부단한 교육 및 적 포로에 대한 불필요한 비인도적 만행을 자제시키고 인간적 인도적 대우를 하고, 공격의 대상은 적의 전투원이 아닌 적의 수괴라는 것, 그로써 각 민족의 독립과 정의를 파괴하는 제국주의 침략행위를 응징한다는 전투의 목적을 부단히 고취시켰다.
안중근 장군이 옥중에서 집필한 미완성 원고 "동양평화론"은 안중근이 가진 평화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절실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러한 안중근 장군의 인간애 동포애는 그의 최종 작전 전개방식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소규모 전투에서 발생하는 아군의 인명 희생에 대한 아타까운 심정은 물론이고 적군 즉 일본군 병사의 죽음에 조차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마침내 작전을 변경하여 대규모 병력에 의한 공개 전투가 아닌 소수 정예원에 의한 비밀임무 수행으로 전환함은 거사의 성공을 위한 효율성면에서도 그러하거니와 그것보다도 불필요한 인명의 훼손을 절대방지하고자 한 안중근 장군의 군사철학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토가 만주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덕순 동지와 함께 각각 권총 한 자루씩을 소지하고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출발. 도중에 장춘에서 이토를 만나면 우덕순이 이토를 살해하고, 하얼빈에서 이토를 만나면 안중근이 사살하기로 약속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이토를 우덕순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시고, 당신께서 지극히 사랑하신 안중근 장군의 손에 맡기시어 안중근 장군으로 하여금 성령의 감도를 받아 노적(老賊) 이토를 하얼빈 광장에서 사살케 하셨으니, 어찌 하느님이 무심타 하리오!
청년 안중근은 그의 동양 평화론 전감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
"지금 세계는 동서(東西)로 나뉘어져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실용기계연구에 농업이나 상업보다 더욱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새 발명인 전기포(電氣砲: 기관총), 비행선(飛行船), 침수정(浸水艇:잠수함)은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고 사물을 해치는 기계이다.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쟁터로 몰아넣어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을 희생물(犧生物: 하늘과 땅이나 사당의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쓰는 짐승, 소, 돼지, 양 따위)처럼 버려, 피가 냇물을 이루고, 고기가 질펀히 널려짐이 날마다 그치질 않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마음이거늘 밝은 세계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예로부터 동양민족은 다만 문학에만 힘쓰고 제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이지 도무지 한치의 유럽 땅도 침입해 뺏지 않았다는 것은, 오대주(5大洲)위의 사람이나 짐승, 초목까지 다 알고 있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런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가까이 수백 년 이래로 도덕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다.
그 중 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그 폭행과 잔인한 해악이 서구(西歐)나 동아(東亞)에 어느 곳이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神)과 사람이 다같이 성낸 까닭에 하늘이 한 매듭을 짓기 위해 동해 가운데 조그만 섬나라인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인 러시아를 만주대륙에서 한주먹에 때려눕히게 하였다.
누가 능히 이런 일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하는 이치이다.
당시 만일 한·청 두나라 국민이 상하가 일치해서 전날의 원수를 갚고자 해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를 도왔다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나 어찌 그것을 예상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한·청 두 나라 국민은 이와 같이 행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일본군대를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 물건을 운반하고, 도로를 닦고, 정탐하는 등의 일의 수고로움을 잊고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거기에는 두가지 큰 사유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할 때, 일본덴노('천황'으로 되어 있는 것을 필자가 고쳤음--필자)가 선전포고하는 글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대의(大義)가 청천백일(靑天白日)의 빛보다 더 밝았기 때문에 한·청 인사는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일치동심해서 복종했음이 그 하나이다.
또한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이 황백인종(黃白人種)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의 원수졌던 심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큰 하나의 인종사랑 무리[애종당(愛種黨)]를 이루었으니 이도 또한 인정의 순리라 가히 합리적인 이유의 다른 하나이다.
통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 년 동안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북소리 한번에 크게 부수었다.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당시 한국과 청국 두 나라의 뜻있는 이들이 기약없이 함께 기뻐해 마지않은 것은 일본의 정략이나 일 헤쳐나감이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뛰어난 대사업이며 시원스런 일로 스스로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슬프다! 천만 번 의외로 승리하고 개선한 후로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같은 인종인 한국을 억압하여 조약을 맺고, 만주의 장춘(長春)이남인 한국을 조차(租借: 땅세를 주고 땅을 빌림)를 빙자하여 점거하였다.
세계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의심이 홀연히 일어나서 일본의 위대한 명성과 정대한 공훈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만행을 일삼는 러시아보다 더 못된 나라로 보이게 되었다.
슬프다.
용과 호랑이의 위세로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와 같이 좋은 기회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안타깝고 통탄할 일이로다.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에 대한 문제는 이미 세계 모든 나라의 사람들 이목에 드러나 금석(金石)처럼 믿게 되었고 한·청 두 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음에랴!
이와 같은 사상은 비록 천신의 능력으로도 소멸시키기 어려울 것이거늘 하물며 한두 사람의 지모(智謀)로 어찌 말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동양 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 하르빈에서 개전하고, 담판(談判)하는 자리를 여순(旅順口)로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여러분의 눈으로 깊이 살펴보아 주기 바란다.
1910년 경술 2월
대한국인 안중근
여순옥중에서 쓰다."
이상의 옥중 논문에서 보듯이 안중근의 평화 염원은 안중근 자신만의 염원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당시 청국)민 모두의 염원이었다.
다시말해서 안중근은 그 평화를 짓밟는 러시아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한 때 한, 청 양 국민은 목소리를 합하여 그 침략주의자 러시아를 한주먹에 때려 눕힌 일본을 예찬했더랬는데,
"그 일본이 하루 아침에 침략주의로 돌변할 줄을 어떻게 알았으리오!"하면서 일본의 변절과 비평화적만행을 규탄하고 있다.
그래서 결론은 안중근 자신이 동양평화를 위해서 정의의 전쟁(義戰)을 하얼빈에서 개전했다고 피력했다.
그리고 세계만국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동양평화문제를 담판하는 자리를 여순으로 정했다,
다시 말하여 한국의 안중근 장군과 일본의 침략주의 원흉 이토간의 전쟁의 이슈가 된 '동양평화문제'를 여순법정에서 안중근을 피고로 하는 재판을 통해 일본과 담판하자고 한 것이다.
결어. 대한국인 안중근, 청년 안중근, 한민족 동포애와 구국 애국 충정의 젊은 피가 끓은 애국자, 평화주의자요 인도주의자이며 천주교 신앙인 안중근, 처와 두 아들과 딸을 둔 가장 안중근... 그는 어찌보면 오늘날 이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청장년들 다시 말하여 우리 모두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모두는 그에 못지 않은 애국심도 있고 동포애도 있고 열심히 가정을 위해 돈도 벌고 평화를 염원하며 성당을 다니든지 예배당을 다니든지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그런 좋은 종교를 신봉하면서 좋은 심성을 가지고 착하게 살고 있다.
그러면 안중근 그분과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그분과 우리의 다른 점은 분명히 있다.
그분은 일생동안 꾸준히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살아오셨다.
"나"라는 개인은 없었고 오로지"대의(大義)"만 그분의 마음 속에 있었다.
평생 대의를 연마했으며 대의의 실현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이 돌봐야 할 가족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잊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큰 대의 즉 국가와 민족과 인류와 평화를 위해서 오로지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그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는 이땅에 하늘나라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분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안중근 자신의 가치일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영원한 가치였음을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히 알수 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심중에 있는 대의를 기필코 실현하셨다.
어떤 험난한 상황과 갖은 애로를 다 치고 나가 마침내 하얼빈 거사를 성공시켰고, 마침내 심중의 뜻을 여순법정에서 만천하에 밝힌 것이 우리 보통사람과 분명히 다른 오로지 안중근 만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 대의를 실천하셨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 거사의 뜻은 무엇인가?
안중근 장군은, 이토를 제거함으로써 한국의 일본식민지화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은 분명 아니다. 그 정도로 무식하신 분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의 독립이 더욱 어렵고 일제의 침략적 만행이 더욱 가속화될 것을 예상하고 계셨다.
"내가 죽거든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이장해달라" 하신 장군님의 유언은 이미 오늘날까지의 우리민족의 장래를 예견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혹자는 말한다. '안중근이 쏜 브라우닝 8연발 총에 탄알이 8발 장전되었는데 7발은 쏘고 한 발은 남겨 두었다. 이것은 그 마지막 한 발로 자결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그것은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소인배의 억측이다.
안중근 장군이 거사하신 목적 자체가, 당시 천하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중국 만주 땅에서 총성을 울림으로써 일본의 침략만행을 온 세상에 알리고 마침내 붙잡혀 재판을 받으심으로써 재판정에서 국제사회에 안중근의 뜻을 피력하고 하심이었기 때문이다.
이토를 사살한 직후 가슴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코레아 우라"를 세번 목이 터져라 외치실 때 이미 안중근 장군의 세상에 대한 외침은 시작되었다. 여순 법정에서 재판과정에서 그 침착하고도 의연한 장군님의 태도와 말씀을 되새겨 보라.
절대로 여늬 졸장부들 처럼, 재판도중에 자살을 한다거나, 아니면 수사에 들어가기도 전에 스스로 죄가 탄로 날까봐 자살해버리는 그런 자들과 같은 용열함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우리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씀을 전세계 누가 들어도 감동이 되는 말씀을 또박 또박 잘해 주셨는가!
그리고 옥중에서 집필하신 그 동양평화론과 인심결합론은 얼마나 크게 가슴깊이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웅변인가!
또 옥중에서 장군님이 친히 써주신 붓글을 받고 적국의 간수 헌병은 얼마나 크게 감사하며 감동을 받았기에 평생 그리고 대를 물려 안중근의 영정과 위패를 자신의 집 불당에 모셔두고 끊임없이 제사 예불을 드렸겠는가!
요컨대 안중근 장군의 10.26 거사의 목적은 안중근의 뜻을 세상에 알리고자 함이었다.
안중근 장군께서는, 안중근의 고국이 완전 독립되고 국권이 회복될때 까지 즉 우리 민족의 조국이 남북한이 완전 평화통일되고 자주독립될 때 까지, 자신의 뼈와 혼백이 거사 현장에 그대로 방치될 지 언정, 남아 있는 동포 형제들 그리고 사랑하는 후손들은 기필코 안중근의 숭고한 뜻을 잊지 말고 그 뜻을 세상에 알리라는 사명을 주셨다.
안중근 운동은 안중근 자신에 의해서 백년전 하얼빈에서 시작되었다.
오늘 20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거사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맞아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있다.
하얼빈 거사 현장에 건립되었다가 오랫동안 지하실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하고 그야말로 방치되었던 우리 안중근 장군님의 동상이 이곳 대한민국땅에 영구 존치될 장소를 찾은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안중근 장군의 뜻을 세상에 알리고자 혼신의 힘을 다 기우려 온 자랑스런 단체,<안중근 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의 노력의 결실이다.
오늘 경기도 부천시 <안중근 공원: 전 중동공원>에서 안중근 장군 동상 제막식이 거행된다. (danji12.com참조)
하얼빈시와 부천시가 자매도시인 관계로 이제 백년전 하얼빈 거사의 숨결이 시공을 뛰어 넘어 바로 오늘 이곳에 와 닿았도다!
이제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안중근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이제 안중근 장군은 백년전 역사의 인물이 아니다. 안중근의 뜻과 함께 우리와 함께 늘 현존하는 청년 안중근이다.
안중근의 고국이여, 안중근의 동포여, 안중근의 뜻과 함께 세계의 등불, 평화의 기수가 되라.
안중근의 숭고한 정신을 가슴에 품고 대한의 청년들이여 용진하라.
2009. 10.26.
길원 남태욱 / 영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