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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장군 하얼빈 동상이 매우 소중한 이유
역사의 현장의 현장 하얼빈서 제작 여순재판소서 진혼제 치뤄
 
서길병   기사입력  2009/09/11 [05:02]
▲  하얼빈서 온 안중근 장군 동상, 국회 안 헌정기념관 앞에 임시 전시 중이다. 10일 영화배우 이일재씨가 동상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 이일재씨는 95년 3월에 방영된 sbs 특집기획 '의사 안중근'에서 안중근 역을 맡아 열연한 바 있다.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해외동포들도 안중근 하얼빈 동상 고국으로 모시기에 한마음으로 동참

지난 9월 1일 인천항을 통해 귀국한 안중근 장군 하얼빈 동상이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안착될 것 같다.
안중근 장군이 100년 전 풍찬노숙하며 서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하얼빈 작전을 전개 했듯이 안중근 하얼빈 동상의 귀국 역시 많은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안중근 하얼빈 동상이 국내로 반입되자 국가보훈처가 난색을 표한 대목이 마음에 걸리지만 국민들의 관심과 신문 방송들의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국회사무처가 적극적으로 안중근 장군 하얼빈 동상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동상의 국회 내 임시전시를 승인하면서 하얼빈 동상의 위상을 지켜준 것은 매우 의미하는 바가 크다.
 
특히 지난 9일 한나라당 당 대표로 취임한 정몽준 신임대표가 주재하는 첫 최고 중진 연석회의에서 안중근 장군 하얼빈 의거 100주년이 되는 해에 하얼빈서 온 안중근 장군 동상이 제대로 자리를 잡아 세워질 수 있게 당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자는 의견들이 나온 것 역시 하얼빈 동상 위상을 제대로 지켜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내 역사적 인물들의 동상이 많이 있지만 이번에 중국 하얼빈서 서울에 도착한 안중근 장군 동상은 매우 특징적인 소중함을 간직한 것이다. 의병운동을 전개한 안중근 장군의 하얼빈 동상의 국내반입작전은 국가기관이 아닌 민간단체 주도로 전개 됐고 여기에 동참한 일꾼들이 대부분 해외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해외동포들이란 특징을 갖는다.
안중근청년아카데미는 이번 작전을 위해 중국을 중심으로 미국, 일본, 영국, 호주 등에 해외지부를 두고 하얼빈 안중근 동상의 귀국길에 동참시켰다.

▲  하얼빈 안중근 장군 동상 귀국 길을 앞두고 지난 6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중국 상해 거주 한인동포들이 '독립운동자금'마련의 심정으로 안중근 장군 귀국길 여비 마련을 위한 골프대회를  가졌다.  ©단지12 닷컴
안중근 장군이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듯이 안중근 장군 하얼빈 동상의 국내반입에는 적지 않은 해외거주 동포들의 숨은 지원과 동상의 중국 반출과 국내 반입과정에서 거치는 통관 업무 등에 숨은 공로자들이 많은 것으로 전해진다.
'보통사람들의 안중근 운동'을 슬로건으로 내건 민간단체가 '안중근 장군 100년 만에 귀국'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서울에 도착시킨 '안중근 하얼빈 동상'이 갖는 가치와 역사적 의미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안중근 장군은 1907년 연해주 망명 길에 올라 3여년 풍찬노숙하며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작전을 감행해 침략국 일본의 최고 우두머리를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안중근 동상은 대한민국 현역군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조각전문가(하얼진 공대 양세창교수)의 손을 거친 한중합작품으로 작전지역인 하얼빈에서 제작됐다.
 
2) 안중근 장군은 하얼빈 작전을 전후해 하얼빈에 11일을 머물었다. 이번 하얼빈 동상은 2006년 1월에 하얼빈 시내에 세워졌다가 중국 당국의 불허로 철거됐다. 동상이 하얼빈에 세워졌던 기간은 총 11일이다. 안중근 장군이 100년전 하얼빈에 체류한 11일과 일치하는 상징성을 가졌다.
 
3) 하얼빈 시내에서 철거된 동상은 지하실에 3년 넘게 임시로 보관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기간은 안중근 장군이 연해주를 기반으로 해외에서 풍찬노숙한 3여년 기간과 일치한다. 동상 역시 3년8개월 동안 햇볕을 보지 못한 풍찬노숙 기간을 거친 후 햇볕있는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  광복절인 8월 15일 안중근 장군 동상은 3년 8개월 만에 지하실에서 햇볕세상으로 나왔다.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4) 지하실에 갇혀있던 동상은 2009년 8월 15일 광복절에 세상밖으로 나왔다. 안중근 장군이 그토록 갈구했던 조국이 독립된 날을 기념하는 광복절에 햇볕세상을 다시 본 것이다.
 
5) 광복절에 귀국 길을 시작한 동상은 100년전 안중근 장군이 이등박문을 사살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 놓아 외친 하얼빈 역을 찾아 안중근의 함성과 안중근의 정신을 담는 '하얼빈 역 노제'를 거치고, 안중근 장군이 유언을 통해 자신의 시신을 묻어달라고 했던 하얼빈 공원에서 안중근의 혼백을 달래 동상에 담는 '하얼빈 공원 노제'를 거쳤다.

 
▲  안중근 장군이 1909년 10월 26일  이등박문을 사살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그 때 그 자리에 안중근 동상 사진과 영정이 서다.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6) 하얼빈을 출발한 동상은 독립운동의 본거지라는 만주 봉천(심양)에 도착 1박하면서 현지 한인동포들의 환영과 환송을 받고 100년 전 안중근 장군이 일제에 의해 쇠줄로 온 몸이 묶인채 압송된 경로를 따라 여순(뤼순)으로 이동했다.
 
7) 동상은 안중근 장군이 5개월 동안 수감생활하면서 재판을 받았던 여순지역에 14일 동안 체류하면서 역사박물관으로 당시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여순재판소 당시 법정에서 안중근의 영혼을 달래고 100년 전 재판이 부당했다는 것을 선언하는 진혼제 의식을 갖었다.
 
▲  8월 27일 오후 안중근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여순재판소 2층 법정에서 100년 전 재판이 부당했다는 것을 선언하고 안중근의 혼백을 달래 동상에 담는 진혼제가 치뤄졌다. 동상 사진이 놓여있는 자리가 당시 100년 전 안중근 장군이 앉았던 피고석이다.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8) 대한의군참모중장의 자격을 갖고, 대한민국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불리우는 안중근의 동상은 안중근 장군의 탄신일 하루 전인 9월 1일 인천항에 도착해 육군군악대의 환영을 받았다.
 
9) 안중근 장군 동상은 안중근 허묘가 있는 서울 효창공원에 도착해, 허묘 앞에서 100년 만에 귀국을 알리는 귀국신고 의식을 갖었다. 이 허묘는 백범 김구선생이 1946년 안중근 장군 유해를 찾을 것을 대비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묘와 함께 조성했다.
 
▲ 9월 1일 오후,  안중근 장군 허묘 앞에 안중근 장군 영정과 동상 사진을 올려 놓고 '안중근장군 100년 만에 귀국'을 알리는 의식을 갖고 있다.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  안중근 장군 동상이 국회에 세워지던 날, 국회사무처 박계동 총장이 안중근 장군과 대화를 하듯 동상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 한국인터넷언론사협회
10) 안중근 장군 허묘가 있는 효창공원을 경유한 동상은 '민의의 전당'인 대한민국 국회 안에 임시전시(임시제막) 영광을 안았고 하얼빈 작전 100주년이 되는 오는 10월 26일 정식 제막을 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하얼빈에서 귀국한 안중근 장군 동상의 역사적 가치는 범상한 동상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 어떤 동상이 하얼빈 역과 하알빈공원을 경유할 수 있고, 여순감옥과 여순재판소를 거치면서 진혼제를 치룰 수 있는가? 그 어떤 동상이 안중근 장군의 하얼빈 정신과 여순의 혼백을 담아낼 수 있는가?

안중근 장군 유해도 찾지 못한 상황에서 하얼빈 작전 1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하얼빈서 온 동상은 작품이 될 수 없는 안중근의 혼백이 깃든 현신이다. 국회 안에 임시 전시되고 있는 안중근 장군 동상은 작품이 아닌 안중근 정신의 상징이다.

이제 오는 10월 26일 안중근 장군 하얼빈 작전 100주년이 되는 날, 동상은 청년 안중근의 민족혼을 상징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에서 안중근 정신 부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일만 남았다.
 
서길병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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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9/11 [05:02]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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