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이 갓 넘어 성공이라는 그림자를 쫓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던 그 시절에 초등학교 때 존경하던 안중근 의사를 남산공원 한 켠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사회시간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안중근 의사를 설명하며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세상에는 세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도움도 안 되고 피해도 안주는 사람’ ‘남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 너희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커서 어떤 사람이 될꺼니?‘ 그 말은 어린 내 가슴에 너무나도 의미가 있었다.
스물이 되어 남산공원 한 켠에서 다시 만나게 된 안중근 의사는 내 마음속 깊이 안일하게 숨어 있던 내 양심을 흔들었다. “지금 너는 무엇을 하고 있니? 넌 혹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아니니?” 숨었던 양심이 울부짖으며 마음속으로 새로운 다짐을 했다. “나는 안중근의사와 같이 절실한 애국자는 아니지만 나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떳떳이 살수 있게 해준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세상을 살면서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고 노을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몇 번 안 될 것이라는 문학 선생님의 말을 상기하며 남산공원에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내 인생을 다짐하면서 안중근 의사를 마음 속 깊이 담았던 것이 기억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는 단지 애국지사로서 민족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를 하얼빈 역 두에서 적격한 것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조심스럽게 접근하게 된 그의 행적에서 이토의 저격은 너무나도 단편적이고 막연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순간 더욱 존경심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투철한 애국심, 굳은 신념, 불굴의 의지 등 모든 행적이 타인의 귀감이 되었다. 또한 그가 치른 거사는 단순한 저격이 아니라 이천만 동포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었고, 한일 합방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으며 만주의 분할을 방지하는 역할도 했다는 것에 그는 동양평화에 크게 이바지 했던 세계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감지 할 수 있었다. 그의 행적 하나하나는 언행일치와 지행합일의 표본이었으며 안중근(그 날 춤을 추리라)의 저자가 그의 행적을 펼치며 우리국민의 푯대라 말함에 있어 한 치의 부족함도 없는 인물이었다.
대한민국 안중근은 우리 가슴에 역사이면서 현실이다. 과거이면서 현재다. ‘하얼빈 의거’는 역사의 갈피 속에 뭍혀 있지만 그의 조국애와 평화사상은 민족정기의 표징으로서 불멸의 횃불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내외의 정황으로 보면 그 횃불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절실한 시대적 명제다. 오늘에 와서 안중근 의사의 생애를 새롭게 추적 발굴하고 그 사상을 겨레의 이름으로 선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본문에서는 국제평화주의자로서의 얼굴과 민족독립운동의 영웅으로서의 얼굴이라는 두 개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동양평화론의 지필 배경에 대해 본 뒤, 오늘날의 동북아의 평화와 경제협력 문제와 연계하여 알아보겠다. 이것은 ‘동양평화론’의 체계와 오늘날의 동북아 정치경제의 논의들을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동북아론의 혼란과 어려움에 대한 역사적 메시지를 얻으려는 것이다. 한 민족주의자로서의 안중근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안중근 의사가 지녔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본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안중근에 대한 여러 평가 중에서 백암 박은식 선생의 평가가 흥미롭다. “안중근...을 평가할 때 어떤 사람은 몸 바쳐 나라를 구한 사라 하였고 또는 한국을 위해 복수한 열렬한 협객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런 찬사에 그친다면, 미진한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세계적 안광 (眼光)을 갖고 평화의 대표자임을 자임한 사람이다”
여기에서 안중근을 한국독립운동의 영웅 혹은 한국민족주의의 상징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국제평화 내지 동양평화의 대변자라고 하는 국제평화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오히려 후자의 이미지를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①서문 ②전감 ③현상 ④복선 ⑤문답의 구조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 서문과 전감만을 집필했을 뿐이고 내용으로 보아 전감 부분도 미완성으로 짐작된다. 의거 후 안중근 의사께서는 옥중에서 동양평화론 집필을 결심하고 이를 밝히자 히라시아 고등법원장은 책이 완성될 때까지 사형을 연기해 주겠다고 하였으나 집필을 마치기 전에 형 집행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의 평화사상은 장기적인 시련을 거쳐 형성된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카톨릭교를 신봉하였다. 독실한 신자로서 그는 인간이 서로 형제처럼 돕고 평화롭게 지내는 세계를 바랐다. 그가 의병을 거느라고 일본군과 싸우던 때에도 일본군 포로를 잡은 후 교육을 시켜 석방 시켰다고 한다. 그 때 부하들은 “왜 일본군은 우리 의병을 잡으면 죽여버리는데 일본놈을 그대로 살려보내는가” 라고 반대하자 안중근은 “일본의 일부 통치자들의 그릇된 책략으로 우리를 침략하였지만 일본 병사들도 일본 백성이며 우리의 적이 아니다. 동양 3국인은 모두 형제이기에 싸울 것이 아니라 단합해야 할 것이니 어찌 포로를 죽이겠는가. 또 포로를 죽이는 것은 국제공범을 위반하는 행동”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안중근 의사는 평화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셨다.
세계기초에 많은 사람들이 동양평화 사상을 언급하였다. 중국의 이홍장도 동양평화를 논했고 일본은 중일전쟁, 러일전쟁과 한국을 침략할 때도 이런 행동이 동양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하였으며 이등박문도 늘 동양평화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들의 침략행위를 덮어 감추려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일본 독재자들의 야만적 통치에 굴종하는 ‘평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비교해 보더라도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 사상이야말로 정의와 합리, 평등을 기초한 사상임이 틀림없다. 2. 제2의 안중근 플랜 최근,노무현 대통령은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 강연 ‘EU(유럽연합)통합과 동북아시대’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EU의 출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중략) 내가 동북아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배하는 나라나 통치받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북아에 EU와 같은 개방적 지역 통합 체제를 만들고, 이러한 질서가 세계질서로 확대되어 나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그런데 EU보다도 반세기 앞서서 지역의 평화공존을 기반으로 한 번영을 주장하신 분이 민족독립의 영웅이자 ‘동양평화론’을 옥중에서 저술하신 안중근 의사 입니다.”라고 연설함을 통해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비로소 참여정부에 의해 부활하고 있다. 김구 선생의 ‘평화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아름다운 나라’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계승하여 혁신하고 실천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보는 뿌듯함은 어느 정부보다도 자랑스럽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최근에 발견된 미완성 원고뿐이므로 이 빈약한 자료를 가지고 그의 사상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고등법원장과의 면담록에서 나온 그의 진술 내용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그 골격을 알 수 있다. 우선, 이를 토대로 현재의 참여정부의 ‘동북아 시대 구상’과 연관관계를 살펴보겠다.
① 일본은 뤼순을 중국에 돌려주고 중립화하여 그곳에 한중일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을 만들고 3국이 그곳에 대표를 파견하여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도록 한다. 재정확보를 위 하여 회비를 모금하면 수억 명의 인민이 가입할 것이다. 각국 각 지역에 동양평화회의 의 지부를 두도록 한다(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의 주장)
- 한반도의 중립적 조정국가론 동북아 평화회의, 6자 회담의 확대론 (현재 참여정부의 구상플랜)
② 원만한 금융을 위하여 공동의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함께 쓰고 공용화폐를 발행하도록 한다. 각 지역에 은행의 지부를 설치한다
- 아세아판 유로머니, ACU의 창설론, 동북아개발은행 설립
③ 3국의 청년들로 공동의 군단을 만들고 그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을 높힌다.
- 동북아 집단안보체제론, 동북아 공동 군축, 비핵지대화론
④ 한.청 두나라는 일본의 지도 하에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한다.
- 동북아 시장통합론,
⑤ 한,중,일 세나라의 황제가 로마 교황을 방문하여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는다. 세계민중의 신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UN의 틀 안에서의 상호존중과 상호신뢰론 여기에서 국제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가 특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당시의 한국의 정치, 외교, 국제 관계를 안중근만큼 아는 이는 없었다. 비록 그의 상세한 결론은 알수 없으나 양심적이고 독실한 종교적 신앙과 탁월한 국제 정세의 감각과 함께 해박한 역사적 인식을 가지고 한국과 동양 제국의 당시의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여 동양의 평화를 제시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80여 년 전 아직 세계에는 국제연맹이나 연합국과 같은 기구가 설립되기도 전에 이와 같은 사상을 제시한 것은 참으로 그 의의가 깊은 것이다. 세계는 2차 세계대전이란 전란을 겪고 나서야 세계평화의 중요성을 간절히 깨닫게 되어 연합국을 상설기구로서 설립하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본세기초에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동양평화 사상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까지 가르쳤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돌이켜보아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 두고 싶은 것은 신뢰의 개념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한,중,일 세나라의 탄탄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여야 만이 공동화폐발행, 동북아개발은행설립 등이 원활하게 추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3. 민족의 영웅, 안중근 한말(韓末)의 역사는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큰 시련이었고 일제의 침략으로 망국의 위기를 당하여 마침내는 나라를 잃어버리는 통한의 모진 세월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애국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으나 다르게 생각하면 무모할 수도 있는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었다. 난세가 영웅을 부른다는 말처럼 이 시기에 저마다의 능력과 위치에 맞게 많은 애국자들이 나타나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에 대항했으나 안중근 의사만큼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세계를 뒤흔들만한 애국정신을 발휘한 분은 찾기 드물다. 안중근 의사에 관한 연구 논문도 많고 전기 형식의 각종 기록, 관련 웹사이트도 매우 많은 것을 보면 안중근이란 인물이 일제 침략으로 더럽혀지고 있던 당시의 우리 역사에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칠만할 의거를 했음에는 틀림없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하얼빈의거’이다. 안중근, 그는 이등박문을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교란자로 단정하고 단지회란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하여 1909년 그를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대한의병의 참모중장 자격으로 향한 것임을 당당하게 외쳤던 인물이다. 애국심으로 불탄 안중근의 행위는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맞서 싸운 항거였던 것이다. 의거 후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힌 다음. 대한의 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재판과정에서의 그의 태도와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내심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가 민족 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된 직후였다. 을사조약 체결 후 그는 전 가족과 함께 중국 상해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진남포에 삼흥(三興)학교(후에 오성학교로 이름을 바꾸게 됨)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토흥(土興), 민흥(民興), 국흥(國興)의 뜻을 가진 학교이름에서 잘 나타나듯이 학교를 통해 나라를 일으킨다는 분명한 뜻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뜻에 따라 모든 열심과 재원을 쏟아 부어 삼흥학교는 점차 번창하여 갔고 이 학교를 통하여 구국운동의 역군을 배출하기 위해 매진하였다.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 라는 짤막한 말씀으로라도 안중근 의사의 교육에 대한 열렬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그 외에도 돈의학교, 서우학회 등을 세워서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1907년 초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날 당시, 안중근 역시 이 운동에 적극 호응하고 참여하였다. 그는 국채 보상기성회의 관서지부를 설치하고 몸소 그 실천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의병활동을 하지 않음에 매우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의병이 되겠다는 커다란 목적을 남모르게 조금씩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연해주로 의병활동을 떠나면서도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강조했던 배움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기 위해 한마다 말을 남기고 떠나게 된다 ‘배워야 산다. 그것만이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다. 무지는 내 주머니 속에서 내 머릿속에서 내 가슴속에서 오장까지 다 빼앗아가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무지한 내 자신을 깊이 반성하게 해주었고, 학업에 열중하여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인물이 되어야한다는 의식을 살려주었다.
의병조직을 마음먹은 안중근 의사는 국내에서의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국외에서 군대를 길러서 고국을 구할 길을 찾기 위해 북간도로 떠났다. 그러나 그 곳 역시 일본 군대가 막 주둔하기 시작한 때여서 발붙일 곳 없이 3개월을 머물다 이후에 블리디보스토크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에서 안중근은 간도관리사를 지낸 이범윤을 만나서 의병부대 창설을 제의하였고 이는 점점 가시화되어갔다. 이 부대가 바로 ‘이범윤 부대’이고 국외에서 조직된 최초의 의병부대라는 점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1908년 안중근의 지휘 아래 두만강을 건넌 의병 부대는 국내 진입 작전을 시도하였다. 이 부대는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일본군 수비대의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일본군을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의 응원 부대가 가세하여 의병부대는 열세에 몰리게 되었고, 의병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안중근 의사는 실의에 찬 부하들에게 그들의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등의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전투 중 많은 부하를 잃었으며 심한 굶주림과 어려움을 겪던 중 1908년 믿을 수 있는 지도층 인사와 단지동맹을 맺게 되었다. 점차 어려워져 가는 시국에서 자기의 굳건한 신념을 증명하는 11명의 동지와 손가락을 잘라 증거를 보이며 자신의 의지를 제천명한 것이다. 11명의 동지들 앞아서 안중근은 무명지 끝마디를 자르고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썼으며 동지들도 이를 따랐다. 상기하였듯이 안중근은 비단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애국 충정에의 기개를 떨친 인물일 뿐만 아니라 교육 계몽 운동에 앞장서서 민중을 교화하고 직접 헌신하여 의병투쟁의 선봉에 선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안중근의 구국에 관한 업적을 논할 때 대개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의거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안중근의 상(傷)은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평가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안중근의 의거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재론의 여자가 없을 것이지만 그 의거에 편중하여 기념비적 차원에서 의미를 강조하거나 또는 안중근의 활동을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으로만 국한시킬 경우 안중근에 대한 이해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안중근의 의거는 그의 구국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하나의 결과물이요, 의지의 산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그때야 비로소 그가 일생을 걸고 추구하여 온 애국에 대한 열정이 제대로 평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안중근 의사의 영향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국내는 몰론이고 중국, 러시아 등 국제 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일본의 침략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중국인들에게도 커다란 충격과 고무를 주었다. 또한 이들은 의거의 주인공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다시금 놀랐다. 몇백년 동안 신하의 나라라고만 여겨왔던 한국에 안중근 같은 인물이 있다는 사실에 탄복한 것이다. 안중근 의거를 통해 일본을 한국과 중국의 공통된 적대국으로 인식시킬 수 있음은 물론, 중국 내에 있는 한국인들이 정당하게 평가되고 대접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의거 후 검소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순국하자, 중국의 유명인사와 지식인들은 경모의 마음으로 추모하였다.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드리우 리....” 최근 안중근 의사가 처형 전에 쓴 한시 7수가 중국 랴오닝 성, 선양시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감홍색 베로 만들어진 길이 5m, 폭 50㎝ 크기의 두루마리에 쓰인 이 유필은 한 선양 시민의 소장품에서 발견됐다. 유필은 모두 한시(漢詩) 일곱 수로 이뤄져 있으며 각 시에 작성한 날짜가 적혀 있다. 유필 작성 시기는 안 의사가 사형대에 오르기 직전인 1910년 2월 4일부터 9일 사이다.
전체 시의 말미에는 '대한국인 안중근 서(書)'라는 낙관과 함께 무명지가 잘린 예의 안중근 의사 수인이 찍혀 있다. 감정가 잔훙거(詹洪閣)는 "시를 쓴 시기와 낙관, 글씨체 등을 감안할 때 위작(僞作)의 흔적은 전혀 없다"고 판정했다.
시의 일부분에는 "흩날리는 눈발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스산해진다(眼中飛雪心中寒), 조국의 강산은 하룻밤 사이에 모두 변하고 말았구나(江山一夜皆至換)"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신문은 "이 유필이 사형 시점(1910년 3월 26일)보다 한 달 보름 전쯤에 작성됐기 때문에 일종의 절명시(絶命詩)라 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안중근 의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내년도 이색 국책사업 중 하나로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사업’이 추진될 예정이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09) 및 순국 100주년(’10)기념으로 남북 공동 발굴을 통해 민족정기를 선양하고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한 취지이다. 10억원 정도의 예산을 투자하여 중국 대련시 여순구 7천여평을 대상으로 발굴예정지를 확충할 예정이라고 한다.
5.결론 앞에서 살펴봤던 안중근 의사가 가진 이 두 개의 얼굴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오히려 이 두개의 얼굴을 갖고 그것을 연결시키고 통합시킨데 안중근 의사의 특징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을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통합이라고 해도 좋다.
이번기회를 통해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왜 3가지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나라를 위해 봉사할 공무원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한 국민으로써의 가치관을 더욱 굳건히 세울 수 있었다. 같은 조선인으로써 나라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송병준, 박제순과 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다른 나라에 귀하하여 자신의 나라의 일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피해를 입을까 모른 척하는 사람, 안중근 의사와 같이 이천만 도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 이렇게 사람을 세 종류로 비교해 보며 어떠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라를 위해 봉사할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써, 눈앞에 이익에 눈먼 봉사처럼 아첨과 악행을 일삼는다거나,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됨을 뼈저리게 느꼈다. 또한, 굳은 신념은 잡음을 없애고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함에 신념에 필요성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독도문제와 함께 과거사 청산 문제를 겪으면서 마땅한 해결책도 찾지 못하고 지지부진 시간만 지채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지켜야 할 정신이 무엇인가를 안중근 의사의 이 두 모습을 토대로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불과 몇 년 전 극장에서 개봉되었던 ‘2009 로스트 메모리즈’란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에선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란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단순한 저격범이나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동양의 평화를 주창하면서도 독립군 중장으로써 한반도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최후의 일환으로 이등박문을 저격하여 우리 나라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떨쳤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이어받고 나아가 평화를 사랑하는 한 독립운동가의 짧지 않은 삶에서 우리들의 민족혼과 민족의 얼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마다한 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제국주의자를 향해 총을 겨누었던 안중근 의사는 지금도 러시아 연해주 땅에서 한민족의 독립을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 남 북한이 이러한 대국적인 견지에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송환하고 남북통일에 한 걸음 나아가는데 안중근 의사가 힘이 되기를 저 세상에서 기원하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안중근 의사 숭모회가 2006년 주최한 안중근 의사 의거 97주년 기념 글짓기에서 대상을 차지한 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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