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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大韓國人 안중근 의사
 
김은송   기사입력  2007/05/08 [21:40]
<제 1일 = 07.27. 모든 것이 설레는 하루.>

 7월26일..내일 한국의 대지를 떠나 타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는 게 믿겨지지 않아 하루종일 일주일여정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사실 그냥 여행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안중근 의사님의 발자취를 따라 간다는 뜻깊은 설레임이 더 컷을 지도 모른다.

  해외 여행을 처음 가는 나는 잠을 설치며 밤을 보내고 27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오리엔테이션 때 나눠주셨던 조끼와 모자를 멋들어지게 쓰고 큰 가방을 끌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아침부터 장맛비는 정말 무섭게 내렸다. 설레임은 어느새 걱정으로 바뀌고"이러다가 배가 출항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조금 초조해 졌지만 택시를 타고 남산 안중근의사 기념관으로 향했다.

비가와서 그런가 내가 2번째로 도착했고 반장오빠와 처장님과 1기의 탐방 이야기를 들으며 2기 탐방단 친구들을 기다렸다. 발대식을 가지고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소기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속초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안중근 의사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희가 갑니다!”
비는 나의 마음을 모른 채 그치지를 않았고 우리는 속초항에 내려 출국수속을 밟은 후 동춘페리호에 탔다. 어느새 탐방단원들은 서로 친해져서 말도 많이하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기대감도 서로 나누며 서로 소개도 하고 페리호 안에서의 탐방 첫밤을 그렇게 보냈다.
배에 오르기 전 배멀미로 걱정했던 나는 생각보다 큰 배에 사뭇 놀랬고 배가 커서 그런지 많이 흔들리지도 않아서 어렵지 않게 여행의 첫발을 내딛일 수 있었다.
 
<제 2일 = 07.28. 긴 여운의 러시아 여행기>

 아쉽게도 배위에서의 일출은 보지 못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 일출을 보러 사진기를 가지고 뱃머리에 나갔으나 어제 비가 온 탓인지 온 사방이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출을 못 본 아쉬움보다는 러시아를 구경할 생각에 아쉬움을 훌훌 털어버릴수 있었던것 같다. 드디어 자루비노항 도착! 손으로 잡힐 듯한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멋진 건물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 사회주의 국가라 검문이 엄청 까다로워 거의 2-3시간 이상을 세관에서 보내야만 했다. 아직까지 생각해봐도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던 거 같다. 어려운 세관을 통과하고 버스를 타고 창밖을 구경하는데 그 자연경관은 정말 장관이었다. 맑은 하늘아래 드넓은 초원. 정말 영화에서 본거 같은 그 초원은 영원히 가슴속에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 초원을 내려서 거닐어 봤으면 하는 생각이 정말 간절했다. 주카노프다리 근처 단지 동맹비를 가서 참배를 드렸다. 생각했던 것 보다 단지 동맹비가 작아서 조금은 실망했으나 더더욱 가슴이 아팠던 것은 단지동맹비 뒤에 일본사람이 지워놓은 “KOREA"글씨는 정말 나를 화나게 했다.
또 주위에 풀이 무성하게 자란 것을 다듬으면서 이 참배지를 잘 관리하지 못하는 후손인 나로써 애국열사님들께 정말 송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에서 몇시간 못있었다는게 큰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우리는 다음 일정을 위해 중국측 세관을 통과하고 훈춘으로 이동해 호텔 체크인 후 석식을 가졌다. 중국에서의 음식은 러시아음식과는 또 사뭇 달랐다.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이 이렇게 가까이 맞닿아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2일차 탐방 토론회를 가지고 처장님의 허락을 받아 야시장에 다녀왔다. 정말 신기한 음식들이 엄청 많았다. 꼬치 종류도 얼마나 많던지..참새꼬치, 굼벵이꼬치도 눈을 딱 감고 먹어봤다. 조선족언니를 만나 중국사람과 말이 안통하는 우리를 잘 도와줘서 정말로 고마웠다. 여행1일차의 밤은 이렇게 저물어 갔다.
 
<제 3일 = 07.29. 꿈에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

 원래 밖에나오면 잠을 설치는 나인데 어제 생각보다 피곤했던지 엄청 곤히 잠을잤던 것 같다.  눈을 떠서 맞는 중국의 아침은 정말 상쾌했다. 어제 묵은 백회호텔은 정말 기대했던것보다 너무 좋았다. 중국하면 조금 지저분함을 상상했었는데 모든게 깔끔하고 한국관광객을 배려한 커피보트까지 어느하나 손색이 없었다.
오래 머물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리는 훈춘시에 위치한 “권하촌”유적지를 탐방했다. 이곳에서 안중근의사님의 영정앞에서 간단히 묵념을 하고 다음 여정지인 한국, 중국, 러시아 국경 접합지인 “방천”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한눈에 세나라의 접경지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북한대지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기서 눈에 밟혔던 점은 이곳을 설명하는 대형간판에 우리나라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해놓은 것을 보고 아직도 우리나라의 부족함을 느끼고 마음한켠이 쓸쓸해졌다. 타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에 실감했다.
더 더욱 기억에 남는 장소가 도문다리였는데 이곳은 정말 손에 잡힐 정도로 북한이 가깝게 보이는 곳이다. 이 다리 아래로는 두만강이 흐르고 빨간 경계선 한줄을 사이에 둔 북한과 중국의 접경지인 이곳은 정말 달려가면 1분거리도 안되는곳의 북한을 이리 멀리서만 바라만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이 아팠다.
북한 건물안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보이고 북한쪽 낙동강모래자갈위에 무엇인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있는 북한사람도 보이고 다리 저쪽 끝에서 보초를 서는 북한군인도 이렇게 시야에 모두 들어오는데..마음은 벌써 저곳에 가있는데..갈수가 없다니.. 정말 분단의 아픔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경계선을 살짝 넘어 북한땅을 밟고 사진을 찍고 우리는 용정으로 이동했다. 대성중학교는 시인 윤동주씨의 시비가 있었다.
구경 후 연길로 귀환하여 세기호텔에서 하룻밤을 묶게 되었다. 호텔에서 우리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한식을 먹었는데 정말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이곳에서는 특별히 세미나실에서 연변대학 교수님을 모시고 말씀을 들었는데 안중근의사님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스토리를 말씀해주셨는데 정신없이 듣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 세미나 후 내일 백두산 등반 하기 전 발을 부드럽게 해주기 위해 발맛사지를 받았는데 너무 시원하고 좋았다.
 
<제 4일 = 7.30. 아! 명산 백두산이여~!>

오늘은 드디어 대한민국의 명산 백두산을 오르는 날이다. 솔직히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모른다. 5시에 기상해서 백두산까지 차로 5시간 남짓을 달렸다.  가이드 언니가  1년동안 천지를 볼수 있는 날이 몇 안된다고 하길래 차안에서 꼭 천지를 보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랬다.
 드디어 도착! 우리는 백두산이라고 명칭하지만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고 명칭한다.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서 그런지 백두산으로 들어가는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버스를 타고 15분쯤 들어갔을까..?
줄을 길게 서서 한 차당 6명 남짓 탈 수 있는 짚차를 타고 꼬불꼬불 굴곡을 쉴새 없이 올라갔다.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중국관광객도 많았고 여기저기 한국인 관광객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귀가 멍멍해지고 차옆으로 보이는 백두산의 그 웅장한 광경이란..이루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역시 우리나라에서 최고 높은 산이라 불릴만큼 그 험하기가 대단했다. 천지에 도착해서는 추워서 긴팔을 걸쳐야했고 바람도 많이 불었다. 안개가 자욱했다. 바위 틈새로 천지를 내려다 보았으나 엄청난 안개 때문에 육안으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안개가 순식간에 겉히고 생기고 하는걸 보면서 정말 신기했다.
안개가 겉히길 바랬으나 시간관계상 말끔히 겉힌 안개속의 천지를 보기에는 무리였다. 일생에 다시 못올수도 있는 천지인데 확실히 느끼지 못하고 간다는 사실이 아쉬웠으나 짚차를 타고 다시 내려와야만 했다.
다른길을 통해 장백폭포도 구경했다. 장백폭포를 이루는 물은 천지에 있는 천지물이라고 했다. 정말 웅장하고도 아름다웠다. 정말 인간이 그 어떤 멋있는 것을 만든다고 하여도 이 자연을 만든 조물주의 솜씨와는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가슴이 확 트일듯한 기분을 만끽하고 내려오는 길에 온천물에 직접 삶은 계란과 옥수수를 먹었다. 신기하게 노른자만 동글동글 하고 흰자는 흐물흐물한 형태였다. 바쁘게 짜여진 일정으로 인해 우리는 한시도 지체함이 없이 다음 여행일정을 위해 연길역에서 하얼빈역으로 가는 20시 기차를 타기 위해 빠른걸음으로 백두산을 빠져 나왔다.
연길역에서 2일동안 우리의 여행을 도와주었던 조선족 가이드 언니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갑자기 내린 비를 가로지르며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늘밤은 야간열차에서 보내야 했는데 침대도 있고 생각보다 너무 편하고 좋았다. 이렇게 밤은 또 깊어갔다.
 
<제 5일 = 07.31. 하얼빈의 가슴벅찬 총성. 대한민국 만세!>

 눈을 떠보니 어느새 기차는 하얼빈역에 서서히 다다르고 있었다. 오늘이 이번 여행 일정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가 될 수 있는 하얼빈역 탐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사람이라면 안중근 의사님 하면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신 분” 이라고 알려져있다. 그 역사적인 장소를 내가 직접 가서 본다고 생각하니 영광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하얼빈역에 내리자마자 역내에 바로 그 저격자리가 표시되어 있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측의 허락을 받지 못해 표시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에 살고계시는 안중근 숭모회 회원분의 끊임없는 노력과 하얼빈시와의 협상을 통해 어렵사리 안중근의사 저격자리와 이토히로부미가 쓰러진 자리를 표시할 수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좋은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있구나..하는 사실에 숙연해졌다. 안중근의사님이 서셨던 자리위에 올라서서 나의 몸은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한 기분을 느끼며 “로르트 메모리즈”란 영화에서 이 장면이 나오는 것을 상상하면서  눈을 감고 그 당시의 하얼빈 역을 상상했다. 정말 내가 그 당시에 태어났었더라면 안중근의사님처럼 그런 큰 뜻을 품을 수 있었을까?

 아침 식사 후 안의사께서 머물렀던 “김성백”집터를 찾았다. 지금은 비록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그곳에서 제홍교를 왔다갔다 하시면서 하얼빈역 의거를 치밀하게 준비하셨다고 한다. 제홍교에서는 정말 하얼빈역이 정확하게 한눈에 들어왔다. 의거를 준비하기까지의 마음가짐과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함을 유지하심을 느끼면서 안중근의사님을 더 우러러 볼 수 밖에 없었다.
한차례의 소나기를 맞으며 하얼빈 공원내의 안중근의사님을 기리는 유묵비를 참배하고 공원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오늘의 일정은 아침부터 서둘러서 그런지 오전에 마쳤고 만방중학교 기숙사에 짐을 풀기위해 우리가 탄 버스는 만방중학교를 향했다. 이곳은 몇 년전 고건 총리께서도 방문하셨던 곳으로 우리나라의 대한학교처럼 시설도 좋았고 열린교육과 체계적인 교육시스템으로 짜여진 멋진 학교였다. 만방중학교근처에서 먹었던 만두는 맛이 일품이었는데 족발과 함께 정말 배부르게 점심을 해결했다.
오후에는 조선 민족 예술관(안의사 기념관)을 찾아서 안의사님의 행적을 다시한번 되짚어보고 그후 몇시간을 더 가서 하얼빈 외곽에 있는 원보산을 탐방했다. 이곳 역시도 하얼빈역 못지않게 나에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곳이었는데 안의사님의 정원과 흉상이있는 곳으로 고 박영길선생님께서 평생을 자비를 모아 안의사님의 흉상을 세우고 혼을 모셔놓은 곳이었다.
고 박영길선생님의 부인이신 윤병자여사님께서 오셔서 눈물을 훔치시며 생전에 박영길선생님의 안의사님을 사랑하신 마음과 흉상을 세우기위한 피나는 노력들을 설명해주시는 것을 들으며 나도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얼빈시 외곽에 위치해 왕복 4시간정도를 달려 간 곳이어서 오랫동안 그곳을 둘러보지 못한게 아쉬웠으나 정말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안중근을 아는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저녁식사후 하얼빈 야시장도 둘러봤다. 정말 오늘은 구경한 곳도 많고 느낀점도 많고 배운것도 많은 하루였다.
 
<제 6일 = 08.01. 그의 비장함을 느끼다>

 2006년 8월의 아침을 중국땅에서 맞았다. 누구나 1일을 맞으면 기분이 상쾌하고 새로운 한달을 기대하는 마음에 기분이 들뜰것이다. 나는 2006년 8월 1일 아침. 중국에서의 아침햇살을 잊을수 없을것이다. 기숙사 교장선생님의 소개로 학교 곳곳을 방문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뒤 우리는 차이차거우역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안의사가 의거를 위해 우덕순, 유동하 동지와 최후를 다짐하였던 곳이다. 길이 좋지 않아 차가 많이 흔들렸고 생각보다 먼 거리였던 것 같다. 차이차거우역 근처는 정말 시골이었다.
우리나라 시골보다도 더 개발이 안된 지역이었고 이곳저곳서 이상한 악취도 났다. 이 역은 거의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안의사님의 숨결을 더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다시 못 볼 동지들과 헤어지는 그 심정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그 비장함이란..과연..내가 평생을 살면서 느낄수 있는 느낌일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곳한곳 안의사님의 발자취를 찾아갈 수록 더욱더 안의사님이 존경스러워지는 이유는 바로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지니고 계셔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 예정에는 없었지만 처장님의 권유로 731부대도 방문했다. 731부대는 말로만 들어봤는데 직접 부대안에 들어와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생체실험했던 도구들을 보고 그 장면들을 전해 들으니 정말 끔찍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이번 여행으로 인해 일본사람들의 대한 적개심이 예전보다 좀 더 많아졌다 말하지 않는다면 솔직히 거짓일 것이다. 정말 잔인해서 나는 그당시 신체실험하는 장면을 재현시킨 모형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731부대 안내원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어서 참 인상깊었다. 그 후에는 하얼빈시 코리아타운에 위치한 “고려회관”을 방문해서 하얼빈대학 교수님의 말씀도 듣고 안의사의 전신 동상앞에서 사진도 찍고 현지에 사는 우리 동포들도 만나보았다. 하얼빈시의 인연은 여기에 두고 우리는 내일 마지막 일정지인 여순감옥을 보기위해 대련역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제 7일 = 08.02. 그대의 숨소리가 들립니다>

 07:00.대련역 도착! 대련의 첫느낌이란..깔끔함! 그자체 였던거 같다. 솔직히 몇일간 중국을 다니면서 거리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참 많이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변변치 못했고 길거리에 흩어진 너저분한 쓰레기들이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그러나 대련은 이번 해 세계적으로 제일 깨끗하고 살기좋은 도시로 선정된 도시인 만큼 거리도 깔끔했고 사람들도 말끔했다. 이곳은 사람이 살기좋은 해양성기후로 현재는 맥주축제가 한창 성행하고 있었다. 대련의 밤거리가 그렇게 멋있다는데 그것을 못보고 온게 아직도 아쉬움으로 마음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오늘 하루 일정은 여순감옥 탐방밖에 없기 때문에 오랜만에 식사 후 커피한잔을 마시며 여유롭게 대련시내를 구경하다가 여순감옥으로 향했다. 이곳은 러시아인이 중국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운 감옥인데 우리나라 애국지사들도 이곳에 많이 투옥됐다고 한다. 나도 처음 안 사실인데 신채호 선생님도 이곳에서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원래는 외국인은 출입할수 없게 되어있고 사진찍는 것도 정부에서 엄격히 금지하고 있으나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 편하게 감옥을 들어갈수 있었다.
그곳에는 안중근의사님께서 순국하신 곳이 아주 적나라하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천장에 달린 밧줄을 보는순간 마음이 콱 멎는듯한 이 심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얼마 안되는 짧은 여행이었지만 어느새 안의사님이 내 마음속에 크게 들어오셨다는 증거가 아닐까? 수용감옥과 고문장소, 한사람남짓 들어갈만한 좁은 감옥안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히 각종 책을 쓰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과연 안의사님이시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동양평화론”에서는 미래를 내다보시는 정확한 선각자적 예언을 하셨다고 하니 동양평화론을 미처 다 쓰시기도 전에 순국하신 것이 한없이 가슴이 아팠다.
감옥 옆 여순기념관(안의사님께서 이토히로부미 저격 후 재판 받았던 법원자리)을 탐방했는데 재판 과정에서도 한치의 두려운 기색없이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일본인의 잘못을 꼬집어 설명하셨다고 하니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생각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는 분이심이 명백함을 알았다.

 이제 7박8일의 모든 일정이 됐다. 배 출항시까지 시간이 남아 대련시에 나가서 할인마트에 들러 못다 산 기념품과 중국아이스크림도 먹고 찻집에 들러 각종 중국차를 먹어보았다.
정말 한국을 떠난 7박8일이 하룻밤의 꿈같이 흘러가 버렸다. 해외에 처음 나와본 나로써는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낸 것 같다. 출항시간이 다가오고.. 모두들 아쉬워하는 마음을 뒤로한 채 우리는 한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제 8일 = 08.03. 나라를 위해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09:00. 인천항 도착! 여기가 드디어 한국이구나! 내리자마자 턱 막히는 더위가 우리를 맞았다.
중국보다 엄청나게 내리쬐는 햇볕에 잠시 적응시간을 가져야했다. 출국수속을 밟으면서 그동안의 일정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쳤다.
안의사님음 10대의 청소년기를 보내고 20대에 우리나라의 역사공부를 하셨고 30대에 서양문물을 접하는 기회를 통해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는데 그와 비교하여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의 내 나이에 우리나라를 위해 어떤일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할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생각에 잠겨있는 도중에 버스는 이미 남산에 닿아있었고 기념관 안에 안의사님 영정앞에서 탐방을 무사히 마쳤다는 말씀을 드리고 간단한 해단식을 가졌다. 짧은기간이었지만 7박을 같이 지새웠던 탐방대원들과도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안의사님을 내 마음한곳에 자리잡은 채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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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5/08 [21:40]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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