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日莫虛渡 靑春不再來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만 3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한 점 부끄럼 없고 빈틈없이 살아 온 안중근 의사가 후세에게 들려준 처세철학이다.
7월 27일
이 땅의 20대 젊은이로 살고 있는 나를 비롯한 30명의 대원은 그 뜻을 기리기 위해 7월 27일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서울 남산 안 의사님 기념관에서 발대식을 가지고 속초로 가는 첫 발을 내딛었다. “안중근”이라는 공통분모 단 하나로 만난 우리의 첫 만남의 설레임과 어색함 그리고 폭우라는 뜻밖의 복병으로 약간의 불안감을 안고 속초항에 도착하였다.
한국 최고의 관광지인 설악산을 끼고 있는 속초항은 최근 이산가족 상봉의 관문과 금강산 관광객들의 출발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출발하는 동춘페리호가 우리를 비롯한 단체관광객들이 러시아를 거쳐 중국 백두산으로 가기 위한 첫 출발지임을 이 때서야 알았다. 게다가 자기 몸보다 3~4배는 족히 커 보이는 가방을 양손이 모자라 머리와 어깨 심지어 발로 끌면서 짊어지고 다니는 보따리상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살기 위한 희망을 안고 국경을 넘나들며 살고 있는 그들의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2층 침대 4개가 빼곡하게 들어선 선실에 짐을 풀고 나니 이제야 대원들의 얼굴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이, 학교, 지역, 모습 모두 다르지만 앞으로 8일을 함께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색함을 지울 수 있으리라. 저녁식사로 나온 김치찌개의 얼큰함을 앞으로 일주일동안 맛보지 못한다는 서운함도 잠시, 이어지는 노래방에서의 첫 강론회. 단장님과 처장님, 과장님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님, 여행사 가이드님를 비롯한 28명의 대원의 첫 모임이다. 엔진소리와 파도의 흔들림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고 아직은 생소한 안중근 의사님의 행적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한 시간 가량의 강론회를 마치고 우리 대원들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형식적인 자기소개가 아니라 좀 더 편한 옷차림과 자세로 서로를 알아가는 얘기를 나누면서 이번 답사가 유적지뿐 만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습도 함께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래본다.
7월28일
일출을 보길 기대하며 5시에 일어난 몇 몇 대원들의 푸념처럼 아직도 안개가 뿌옇고 날씨가 흐리다. 서둘러 씻고 아침밥도 먹고 갑판에서 사진도 찍었건만 하선하라는 방송은 나오지 않는다. 7시 러시아 자루비노항에 닿은 지 한 시간만인 8시가 넘어서야 드디어 러시아땅을 밟게 되었다. 푸른 초원에 붉은 벽돌의 집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러시아 여자들과 건장한 체구의 러시아 남자들의 이국적인 모습에 밤새 친해진 대원들끼리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5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국심사와 우리 측의 입국신고서를 잘 못 쓴 실수로 12시가 넘어서야 러시아에 입국할 수 있었다.
크라스키노에서 최고급 식당에서 러시아식 점심을 마치고 첫 유적 방문지인 주가노프 다리 근처에 있는 단지동맹비를 보기 위해 버스는 달렸다. 양쪽에 펼쳐진 드넓은 초원의 평화로움를 느끼다보니 어느새 접어든 비포장도로, 그리고 풀숲에 가려져 그냥 지나칠 정도로 덩그러니 서있는 불꽃모양의 기념비 하나. 단지동맹은 동의회의 산하조직으로 1909년 2월 크라스키노 근처 하리 마을에서 안중근, 김기룡, 백기삼 등 12명의 피끓는 의병들이 모여 서로의 손가락을 끊어 혈서로 '大韓獨立'이라는 네 자를 쓴 후 몸과 마음을 나라에 받치기를 맹세한 조직이다. 그 분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2001년 10월 한국광복회와 고려 학술재단에서 러시아 정부의 승인을 얻어 세워진 비가 바로 단지동맹비다. 하지만 실제 단지를 절단하며 12명의 결행을 다짐했던 연추하리(煙秋下里) 지역은 차로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작은 길의 산 밑이라고 했다. 그 초입만 확인하고 돌아선 우리는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잊혀지고 있는 현실의 각박함에 허망함을 느낀다.
더불어 현재 남아있는 역사의 뜻마저도 소홀한 관리감독으로 의미를 상실하고 있음에 분노가 생긴다. 단지동맹비는 앞면은 한글, 뒷면은 러시아어로 되어있는데 러시아어 부분은 아예 글자가 뭉개져 판독이 불가능한 곳이 7~8 군데나 되었다. 특히 글자가 훼손된 곳은 ‘한국'(Koreya)이라는 단어에 집중되어 비석 훼손이 의도적이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고작 우리가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거진 잡초를 뽑고 비석의 먼지 정도 닦는 것 뿐 이었지만 잊지 않고 기억하리라.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으로 방랑하며 손가락 절단의 아픔마저 깊은 뜻으로 승화했던 그 분들의 뜻을.
러시아의 일정은 여기까지이다. 안중근 의사가 첫 해외독립운동의 시작지인 블라디보스톡을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접고 수월한 중국입국을 마치니 연변 조선자치주에 속하는 훈춘(琿春)에 도착하였다. 훈춘이란 만주어로 변경을 뜻하는데, 사실상 러시아·북한과의 국경에 접해 최근 중국은 이 곳을 자유무역도시로 만들어 ‘북방의 홍콩’으로 만들 것이라고 홍콩 언론이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 곳은 우리나라의 한적한 시골마을처럼 친근하고 낯익은 느낌을 받아 중국이라는 낯설음이 전혀 없었다. 거리의 간판도 한글로 되어 있고 어색한 조선족 말투지만 말이 통하는 그 곳, 우리 민족의 땅이었던 시간이 더 길었던 그 곳이지만 분단이라는 뼈아픈 현실 앞에서 서울에서 이틀에 걸쳐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이틀 여정의 피로를 훈춘호텔에서의 안락함으로 풀고 두 번째 강론회 시간을 가졌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처럼 첫 답사를 마치고 나니 어렴풋하게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따른 듯 하여 뿌듯하다.
답사와 더불어 우리는 현재 중국의 모습을 보고자 훈춘 시내 야시장 구경에 나섰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왁자지껄한 중국인들의 활기가 여름의 더위만큼이나 후끈 느껴진다. 기예단 구경꾼들을 뚫고 본격적인 시장에 들어서니 온갖 부위를 꽂아놓은 꼬치류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거나 옥수수가루를 얇게 편 과자를 먹는 사람들, 과일좌판과 해바라기씨 좌판 그리고 각종 악세사리를 만드는 좌판의 장사하는 사람들이 눈에 가장 많이 띄었다. 그리고 유치할 정도로 간단한 각종 놀이를 도박 삼아 즐기거나 멋진 글씨를 그림처럼 써주는 신기한 모습을 보며 살아 숨쉬는 중국의 또 다른 면에 여행의 흥을 더해본다.
시장에서 사 온 물보다 싸다는 맥주와 고소한 해바라기씨를 안주 삼아 둘째 날 우리만의 강론회를 가진 중국에서의 첫 밤이 깊어간다.
7월 29일
모닝콜 6시 30분. 텁텁한 입에 느끼한 중국음식이 아침부터 들어가기 힘들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버스에 오르니 현지가이드인 박미복 언니의 일정소개가 이어진다. 오늘은 가야할 곳이 훈춘을 거쳐 연길까지 이어지는 바쁜 날이다.
아침잠의 몽롱함과 함께 내린 한적한 시골마을. 여느 마을처럼 뉘 집의 개가 낯선 이들을 향해 짖고 호기심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며 들어선 어느 초가집. 표지판조차 없었다면 곧 헐릴 초가집으로 생각했을 이 곳이 안 의사가 1908∼1909년 연추하리 등 러시아와 중국을 오가며 항일 운동을 하던 중 가끔 들르거나 며칠 묵었던 것으로 알려진 초가란다. 훈춘시가 1999년에 문화재로 지정∙관리하고 있다고는 하나 안중근 의사의 흔적을 느낄 만한 기념적인 것도 없고 허술하게 보일 뿐이었다. 다만 소박한 안 의사의 정신답게 단출한 살림살이만 인상 깊었다.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중국, 북한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가 만나고 두만강 하류지점인 멀리 동해가 보이는 방천으로 이동하였다. "닭울음소리 3국에 들리고 개 짖는 소리 3강을 깨우며 꽃향기가 사방에 풍기고 웃음소리가 이웃나라에 전해지는 곳"이라 표현하고 있는 이 곳에 있는 망해각이라는 건물에 올라서니 러시아, 중국 그리고 북한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일본해라고 명명해놓은 팻말에 다시금 울분을 토하며 볼펜으로 휘갈겨 써놓은 관광객들의 글씨에 씁쓸함을 느낀다. 가까이에 두고도 시정할 생각조차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모를 우리 정부의 무능력함.
점심은 지난 밤 묵었던 훈춘호텔에서 비슷한 음식이다. 더운 날씨에 시원하고 개운한 냉면생각이 절로 난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보니, 100년 전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강을 건넌 사람들부터 지금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언 두만강을 몰래 건넌 북한 사람들의 한과 설움 때문인지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사처럼 두만강은 푸른 물이 아닌 뿌연 흙탕물이다. 낯익은 오성기와 함께 인공기가 나란히 붙어있는 도문국경지역에 들어서니 왠지 모르게 긴장된다. 전망대에서 바라보고 도문대교를 건너며 살짝 국경을 넘어보고 기념품가게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TV에서 보던 북한이 아닌 우리 곁에 다가온 북한을 보고 간다.
드라마 “토지”에서 서희와 길상이 고향을 떠나 살림을 일구고 독립운동을 했던 용정에 왔다. 현재는 용정중학교로 조선족 학생들이 다니고 있지만 대성중학교란 이름으로 애국지사들을 길러냈던 과거의 건물은 역사전시관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특히 민족시인 윤동주의 시비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와 항일투쟁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일제에 맞선 대한민국은 없다. 다만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의 역사만 있을 뿐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발한 용정시에서 연길로 조금 나오면서 본 작은 정자가 선구자라는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一松亭)이다. 원래 있었던 소나무는 일본이 우리의 정기를 끊어 버리려고 폭격을 하는 바람에 죽어 버렸다고 한다. 이 일송정에서 보는 한 줄기 해란강을 보며 선구자의 꿈을 가지고 외로운 싸움을 했을 이름 모를 이들을 생각해본다.
연길 대우호텔에서의 한식뷔페 저녁식사를 만족스럽게 한 후 “연길지역과 우리 독립투쟁 역사”를 주제로 연길대학의 리송덕 전 교수의 강론을 들으며 다시금 어쩔 수 없는 우리와 그들의 역사적 시각차를 느꼈다.
바쁜 탐사일정 중에서도 저녁 시내 구경은 빠질 수 없다. 가이드 언니의 안내로 시내 발마사지가게에서 한 시간 동안 80위안으로 지친 발이 호사를 누릴 시간을 가졌다. 여자는 남자가, 남자는 여자가 발 뿐만 아니라 어깨도 마사지해주는데 바짝 얼어버린 남자대원들의 모습에 한 번 웃고 발톱까지 깎아줬다는 이야기에 두 번 웃으며 넓은 호텔 로비에서 중국의 유명한 칭따오맥주와 함께 한 우리만의 강론회로 연길에서의 밤을 지새운다.
7월 30일
잔 것 같지 않은데 벌써 기상이다. 새벽 4시 그리고 4시 45분 출발. 버스에 타자마자 모두들 부족한 아침잠에 빠져든다. 덜컹거리는 버스의 흔들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잘 자던 우리는 아침식사를 위해 허름한 건물 앞에서 내렸다.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마치고 문이 절반 밖에 없어 통풍이 매우 잘 될 듯한 화장실을 다녀오자마자 또 버스여행이다.
10시쯤 장백산(長白山)입구에 도착했다. 중국으로 왔으니 눈이 오랫동안 녹지 않고 장백산맥과 닿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장백산(長白山)이 분명할진데 우리가 부르는 산꼭대기가 흰 눈에 덮여 하얀 뜻의 백두산(白頭山)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그런 감상도 잠시. 휴일을 맞이하여 관광 온 중국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버스타기 전쟁이 시작이다. 메뚜기 더듬이 모양의 순환버스를 타고 18km를 가면 천지 오르는 입구가 나온다. 운전수를 포함한 7인승 지프차는 먼저 정원이 다 차면 출발이다. 나를 비롯한 6명의 대원들과 함께 지프차에 오르니 급한 경사와 굽이굽이 S자 코스 그리고 운전수의 곡예운전으로 차체가 심하게 흔들린다. 그 와중에도 천지에 오르는 길에 울창한 숲을 지나 한 폭의 그림엽서 같은 들꽃과 초원이 펼쳐진 광경을 놓칠 수는 없다. 이것도 5월부터 9월까지만 볼 수 있고 나머지는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인 기간이란다.
지프에서 내려 천지를 볼 수 있는 화개봉으로 오른다. 삼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지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천지답게 아직은 부족한 나에게 쉽게 그 모습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곳에서 내려다보는 산 아래는 유명한 세계 명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아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장엄하다. 백두대간의 시작이자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에 다음에는 통일된 우리 땅에서 오르기를 기원한다.
이제는 내려 가야할 시간이다. 그런데 내려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지프차를 타는 것조차 쉽지 않다. 다수의 팀이 먼저 차지해야하는데 말도 통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인들과 경쟁 아닌 경쟁을 해야 할 상황이다. 먼저 온 순서대로 줄만 서면 될 터인데 관리자는 보이지 않고 서로 다투고 몸싸움까지 갈 지경이다. 지금까지 일정 중 제일 힘들다. 어렵게 내려오니 이미 다른 대원들도 우여곡절을 겪으며 내려온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장백폭포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가는 도중에 온천물에 익힌 계란과 옥수수 파는 가게가 있는데 희한하게도 노른자부터 익는다한다. 완숙된 흰자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그다지 비위에 맞지 않는다. 쭉 뻗은 소나무와 아기자기한 노란 들꽃을 감상하며 오르다보니 구름의 장난인지 소나기같은 비가 쏟아진다. 그것조차 낭만적이다.
한 줄기 거대한 폭포수가 눈 앞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고 계곡물에는 맑은 물이 철철 흐르는 “장백폭포”가 쓰인 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오후 야간열차 시간에 맞추기에 빠듯한 일정 탓으로. 오랜 세월동안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낙차의 수량이 줄지 않는 장백폭포, 가까이 다가가면 천지에서 토해내는 거대한 폭포의 굉음이 대지를 진동시킨다는 말은 다음에 확인해볼 수 밖에.
애국가 1절의 가사처럼 백두산 천지에 담긴 우리 민족의 기상과 아픈 역사를 돌아보며 천지의 맑은 물빛을 가슴에 담은 소중한 기억이 담긴 하루였다. 연길역이 아닌 시골의 허름한 역에서 하얼빈행 야간열차를 기다리는 밖에는 비가 내리고 우리의 답사도 중반으로 접어든다.
7월 31일
이번 답사의 핵심인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6시 30분 새벽이라 모두들 정신이 없지만 벌써 역에는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의 아침은 정말 빨리 시작되고 활기차다. 작년까지만 해도 없었던 안중근 의사 저격지점과 이토히로부미의 피격지점이 삼각형 대리석으로 표시되어있었다. 설명도 없어 모르고 지나치기 쉬울 돌판에 불과하지만 죽음을 불사하고 방아쇠를 당기고 ‘코레아우라!’를 외쳤을 그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 모두의 마음은 뜨거워졌으리라. 숙연한 마음으로 묵념을 하고 거사를 행하기까지 거쳤던 행적을 따라가 본다.
190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얼빈에 도착한 10월 22일 밤부터 이토를 저격한 10월 26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일행은 마차를 타고 당시 한인사회에서 신망 높던 김성백의 집에서 묵게 된다. 이 곳은 지금 중국은행으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음날인 23일은, 안중근 일행은 김성백의 집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떨어진 하얼빈 공원으로 갔다. 공산당 항일 영웅이었던 이조린(李兆麟)장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유해를 이곳에 안장하고 공원 내에서 장례를 치러 조린공원으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공원이기도 하다. 안중근 의사의 최후의 유언에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주십시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마땅히 힘 쓸 것입니다." 했기 때문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공원을 거닐며 지금 걷는 이 길을 걸으며 고뇌했을 인간 안중근을 떠올려본다. 10월 25일 채가구역에 갔던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돌아와 제홍교에 서서 거사현장을 확인한다. 우리 역시 다리에서 철로를 바라본다. 거사를 앞 둔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까 해서.
드디어 10월 26일, 오전 7시경 도착한 안중근. 그리고 9시경 이토 일행이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고 마중 나온 러시아 코코프체프 일행이 열차 안으로 들어간 후, 그와 일본 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토 일행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전 9시 30분 7발의 총성과 함께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는 순간 안중근 의사는 ‘코레아우라(대한만세)’를 외친다. 정치적으로 미묘하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서둘러 그를 일본총영사관으로 인계한다. 안중근 의사가 체포되어 감금되었던 그 곳은 현재 소학교 지하실로 변해있었다.
비 오는 하얼빈을 거닐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비로 인해 축축해진 몸과 밤새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피로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조선민족예술관에서 안중근 의사 관련 자료를 본 뒤 하얼빈 시내에서 4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만방중학교.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흑룡강성 최초의 조선족 자치 사립학교라는 명성에 걸맞게 세련되고 현대적인 시설이다. 깔끔한 기숙사에서 짐을 풀고 쉬고 싶으나 다시 오후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유명한 만두집에서 점심을 든든히 먹고 1시간 30분을 쉼 없이 버스가 간다. 원보산이라는 곳에 간다는데 피곤함에 약간은 짜증이 난다. 결국 도착해서 보니 우리가 보려는 것은 안중근 의사 흉상과 무명용사의 비 뿐이다.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우리 앞에 낯선 분이 서 계신다. 조선족 안중근 숭모회원이신 고 박영길씨의 부인이시다. 고 박영길씨는 올 1월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뜨실 때까지 오직 개인의 힘으로 원보산 납골지에 안중근 의사의 영혼을 모시고 흉상을 세워 그 뜻을 이어나가셨다. 중국정부는 외국인의 동상을 세우지 못하게 하고 있어서 그간 안중근 의사의 동상도 세우기 어려웠다고 하니 그 설움과 압박을 토해내셨던 부인의 눈물에 마음이 아파왔다. 좀 전에 가졌던 짜증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위로도 해드리지 못하고 돌아서야했던 우리 대원들의 얼굴에 미안함이 서려있다.
장 지오노 원작의 <나무 심는 사람>의 주인공처럼 황량한 사막을 한 그루 한 그루 나무숲으로 일궈냈듯 어떠한 보상한 바라지 않고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단 한 명의 사람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살아갈 이유가 될 것이다.
8월 1일
오전은 만방중학교 견학으로 시작된다. 김원준 교장선생님의 소개에 따라 설립배경과 학교운영현황 그리고 각종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설명을 들으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한국의 어떤 중/고등학교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시설과 교육관이 현대적이며 국제화되어 있다. 도서실, 어학실, 컴퓨터실, 음악실, 미술실 등 각종 특별실마다 기자재가 잘 갖춰있고 아이들의 실력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해외 교류를 통해 국제인으로 자라날 중국의 소수민족이 아닌 국제적인 조선족 아이들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다.
단체기념촬영을 마치고 길 찾기 조차 힘든 시골의 비포장도로에 2시간만에 내리니 악취가 코를 찌른다. 소와 당나귀가 함께 사람과 길을 건너고 파리 날리는 고깃덩어리가 보이는 거리를 지나 작은 길로 접어드니 쓰레기가 쌓인 화장실이 눈 앞에 나타난다. 보기만 해도 비위가 상한다. 이 곳이 바로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의사가 거사를 준비했던 한 곳이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우덕순, 조도선은 채가구역에서 이토를 저격하려고 계획한 것이다. 그들은 거사를 앞두고 눈물겨운 이별을 했다고 하니 이 곳이 남다르게 보인다. 그들이 혼자가 아닌 함께 하며 힘든 시간을 이겨냈듯이 우리가 혼자가 아닌 함께 이 곳에 온 의미가 있을 것이다.
헤매다 온 탓으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점심은 지났지만 우리가 가야 할 중요한 곳이 바로 731부대이다.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로 1936년에서 1945년 여름까지 전쟁포로 및 기타 구속된 사람 3,000여 명을 대상으로 각종 세균실험과 약물실험 등을 자행했던 악명 높은 곳이다.
을씨년스러운 건물 외관처럼 안에 들어서니 찬 냉기가 느껴진다. 현지가이드의 중국어 설명을 우리 가이드가 통역해 주신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루타’는 일본말로 통나무라는 뜻으로 2차대전 당시 일제 세균부대 중 하나였던 '731부대'에서 희생된 인체실험 대상자를 일컫는다고 한다. 산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친 731부대에서는 1940년 이후 매년 600명의 마루타들이 생체실험 대상이 돼 최소한 3천여 명의 중국, 러시아, 한국, 몽골인이 희생되었다고 하니 정말 인간이 아닌 통나무 즉 마루타였나 보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잔인성의 한계란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몸서리쳐지는 그 곳에는 人間이 없다. 늦은 점심을 KFC 햄버거로 때우며 우리는 하얼빈코리아타운 안중근사적전시관에 왔다. 이 곳 역시 하얼빈 거주 조선족동포들의 힘으로 자료를 모아 세운 전시관으로 시설적인 면은 여느 박물관에 비해 떨어지지만 자료의 질이나 자부심만큼은 대단했다. 다만 한글 설명서가 없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저녁은 하얼빈역 근처의 호텔에서 예쁜 치파오를 입은 중국 언니들의 친절한 서빙으로 즐겁게 먹었다. 그리고 우리들끼리 8월 2일 경선이의 생일을 위한 깜짝파티를 위해 호텔베이커리에서 작은 케잌도 준비하였다.
8월 2일
0시. 경선이의 생일이다. 생일초를 팔지 않는 중국이기에 급한 대로 담배에 성냥을 꽂았다. 문이 없는 6인실 객차 안이 우리들만의 생일파티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불과 6일전만해도 서로 모르던 우리였지만 지금은 하루 24시간을 함께 하며 너무나 익숙하고 편해져버린 모습들이다. 내일이면 헤어진다는 사실이 섭섭하다.
아침부터 부산스럽다. 중국인들의 발빠른 아침준비로 인해 늦게 일어난 우리들은 세면대 물도 끊기고 생각보다 너무 일찍 대련에 도착하는 바람에 자는 모습 그대로 기차에서 내렸다. 다행히 아침식사를 하는 호텔 시설이 좋아서 급한 대로 씻고 옷을 갈아입고 답사 마지막 일정을 시작한다.
대련에서 약 40여 분을 가면 동양의 아우슈비츠가 불리는 여순감옥에 도착한다. 안중근 의사가 투옥되어 생을 마친 곳이다. 러시아가 1902년 짓기 시작해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이곳을 접수해 증축시켰다. 검정색 벽돌은 러시아가 지은 것이고 빨강색 벽돌은 일본이 지은 것이다. 여순감옥은 연간 60만 명의 중국인이 찾는 관광명소지만 인근에 해군기지가 있는 등 군사지역이라는 이유로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는 개방되지 않고, 중국여행사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개방되고 있다. 들어가서도 우리말을 쓰거나 카메라를 쓰는 것이 모두 금지란다. 그러나 우리는 처장님과 여순감옥 관계자의 배려로 당당하게 정문으로 출입하는 영광을 누렸다.
입구에서부터 쭉 살펴본 감옥 내부에는 온갖 고문기구들과 당시의 교수형 형장 내부, 죄수복, 사형수 시체가 든 목제통 등 생생한 역사의 잔인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이 치욕스럽고 잔인한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며, 후대의 교훈으로 물려주고 있다니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글귀가 생각난다.
잡범과는 달리 국사범으로 유일하게 독방을 수감된 안중근 의사는 이 곳에서 순교하시기 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며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셨다. 30세의 나이에 일본의 최고 권력자 중 한사람을 제거하고, 31세의 나이에 어머님이 손수 해주신 한복을 차려입고 교수대에서 의연하게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께 묵념을 하는 것을 끝으로 감옥을 나오니 밝은 햇살이 반갑게 느껴진다. 자유란 이런 것일까, 평화란 이런 것일까.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들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이겨내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싸우신 정신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번 답사의 마지막 유적지는 여순지방법원이다.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된 곳이다. 법원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관람하며 전보다 더 뚜렷하게 다가오는 생애와 업적 그리고 깊은 뜻을 알 수 있었다. 실제 재판장에 앉아도 보고 전시물 설명을 읽으며 마지막으로 영상자료를 보면서 일주일 만에 부쩍 세상을 보는 나의 시야가 넓고 깊어진 것 같았다. 왠지 뿌듯하다.
오후 출항하는 인천행 배를 타기 위해 대련에 돌아오는 길에 다른 도시에 비한 깨끗함에 환경도시라는 명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행은 아쉬울 때 돌아오라는 말이 있듯이 출국수속을 끝내니 어느새 중국이 그리워진다.
오랜만에 김치찌개를 저녁으로 먹고 난 후, 마지막 강론회에서 모두들 무사히 마쳤다는 기쁨과 더불어 이제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되는 소감을 말하였다. 우리들만의 마지막 강론회 역시 아쉬움을 접고 한국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만남의 시작을 다짐하며 배는 인천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8월 3일 그리고 에필로그
인천항에 도착하자마자 후텁지근한 날씨가 우리를 반긴다. 하지만 에어콘 버스 덕분에 시원하게 우리의 종착지인 서울 남산 안중근기념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단식과 마지막 플랭카드를 펼쳐 단체사진을 찍고 난 뒤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는 것이 더욱 어색하다. 내일이면 또 만날 것처럼 익숙하건만.
지난 8일의 여정을 돌이켜보면 ‘안중근’이라는 단 하나의 공통분모로 만난 각기 다른 모습의 우리들은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찾아 다니며 생각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점점 닮아갔던 것 같다. 동시대를 함께 살면서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하면서도 현재를 즐김에는 망설이지 않았던 우리들.
안중근 의사의 白日莫虛渡 靑春不再來(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이 글의 첫머리처럼 러시아와 중국을 거치면서 우리가 품고 왔던 작은 씨앗이 미래의 큰 꽃으로 피워 안중근 의사님이 바라는 동양평화에 일조할 수 있기를 우리 모두에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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