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이듬해 안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신지 99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안 의사는 우리 가슴에 애국선열의 전범(典範)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우리국민 대다수는 안 의사의 의거를 여러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 정도로 외워왔고, 또 그런 정도로 인식해온 건 혹시 아닐까요? 안 의사의 의거가 한 세기가 지나도록 후손된 우린 과연 무얼 했을까요?
▲ 의거 후 체포된 안중근 의사의 모습 © 단지12 닷컴 | |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이후 모두 여섯 차례의 재판 끝에 이듬해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로부터 다시 40여일 뒤인 3월 26일, 의거일로부터 1백52일 되던 날 안 의사는 교수형으로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안 의사의 유해는 감옥 뒤편 공동묘지에 매장됐는데, 안 의사는 조국이 광복되면 자신의 유해를 고국으로 옮겨 묻어달라고 유언하였습니다. 그로부터 99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안 의사의 유해 봉환은커녕 유해를 찾지도 못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입니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 소재 숙명여대 앞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루턱에 좌우로 갈래길이 나오고 그 앞에 공원 하나가 나옵니다. 왼쪽길을 따라 100여 미터를 내려가면 효창운동장이 나오는데 이 일대를 두고 흔히 효창원이라고 부릅니다. 효창운동장이 시작되는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언덕배기로 향하면 묘소 하나가 나타는데, 이곳이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입니다.
백범, '3의사 묘역'에 안중근 의사 '가묘' 조성 백범의 묘소 오른편 아랫녁에는 이른바 ‘3의사(義士)묘역’이 있습니다. 3의사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를 말합니다. 이, 윤 의사 두 분은 널리 알려진 분이어서 소개를 생략키로 합니다. 백정기 의사는 1933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군 요인을 암살하려다 밀고로 체포돼 일본 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1945년 11월 23일 중국에서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로 봉환하는 것이었습니다. 백범은 우선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3의사의 유해발굴에 나섰습니다. 이듬해 6월 3의사의 유해가 수습돼 부산에 도착할 무렵 백범은 몸소 부산까지 내려가서 현지에서 추도식을 지낸 후 3의사의 유해를 맞았습니다.
서울로 올라와 3의사의 유해 안장 장소를 물색하던 백범은 유서깊은 효창원 내에 묘터를 정한 후 과거 문효세자가 묻혔던 이곳에 3의사의 유골을 안장하였습니다. 그리고는 3의사 묘단에 친필로 ‘遺芳百世(꽃다운 향기여 영원하라!)’라는 휘호를 남겼습니다. (* 1948년에는 중국 중경에서 독립운동 중에 순국한 이동녕ㆍ차리석 선생의 유골을 중국에서 모셔와 안장하였고, 같은 해 국내에서 서거한 조성환 선생을 두 분 곁에 안장하였다)
▲ 효창원 '3의사 묘역'. 제일 왼쪽 묘비가 없는 묘가 안중근 의사의 '가묘'이다 © 단지12 닷컴 | |
‘3의사 묘역’에는 위에서 소개한 의사 세 분의 유해가 안장돼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의사는 세 분인데 묘소는 4기입니다. 그리고 그 중 제일 왼쪽, 즉 윗자리의 묘소에는 묘비가 없습니다.
묘비가 없는 이런 묘를 흔히 가묘(假墓), 혹은 허묘(虛墓)라고 하는데, 대개 나중에 묘를 쓰기 위해 임시로 봉분을 만들어 두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가묘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바로 안중근 의사입니다. 백범은 3의사의 묘소를 만들면서 미처 유해를 찾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봉환해올 것으로 믿고 가묘를 만들어 둔 것입니다.
최근 백범의 비서를 지낸 선우 진 선생이 펴낸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푸른역사 펴냄)에 따르면, 1948년 남북협상 차 방북했을 때 백범이 북한 김일성에게 안 의사 유해 천장(遷葬, 이장) 문제에 대해 협조를 구했는데, 이 때 김일성은 여순(旅順)이 소련의 계엄 하에 있기 때문에 곤란하다며 '통일이 되면 모셔 내올 텐데 뭘 그리 서두르십니까' 했답니다.
그간 남한은 물론 북한도 안 의사의 유해발굴을 위해 나름으로는 노력을 한 것으로 압니다만, 남북한 모두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환국 후 백범은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3의사와 안 의사의 가묘가 있는 이곳 ‘3의사 묘역’을 찾아 고인들에게 지혜를 구했다고 합니다.
▲ 3의사 묘역을 참배하는 생전의 백범 김구(가운데) © 단지12 닷컴 | |
다가오는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99주기입니다.
이날 서울 남산 중턱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방문해서 안 의사를 기리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올해는 효창원 ‘3의사 묘역’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참배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순국하신지 100년이 다되도록 유해조차 발굴하지 못한 우리 후손들이 비록 가묘이긴 하지만 안 의사 영전에 무릎 꿇고 사죄라도 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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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36주기 추도식 - 1946. 3. 26]
▲ 3의사 추도식장에 배치된 이승만 김구 조화 ©단지12 닷컴 | |
▲ 안 의사 36주기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하는 백범 © 단지12 닷컴 | |
▲ 안 의사 36주기 추도식에서 백범의 맏며느리이자 안 의사의 조카인 안미생 여사(앞줄 왼쪽 두번째)가 백범의 추도사를 경청하고 있다 . © 단지12 닷컴 | |
[3의사 유해봉환 추도식 및 효창원 안장식-1946. 6. 15, 1946. 7. 6]
▲ 1946년 6월 15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3의사 추도식 © 단지12 닷컴 | |
▲ 3의사 추도식에 참석한 백범, 백범 앞에 3의사의 유해를 담은 상자가 놓여 있다 © 단지12 닷컴 | |
▲ 3의사 추도식에서 분향하는 백범 © 단지12 닷컴 | |
▲ 서울 효창원에서 열린 3의사 유해 안장식 장면 © 단지12 닷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