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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민족정신 속에서 남북통일 열쇠 찾자
<기고>남북공동 유해찾기 보다 남북이 안중근 정신찾기에 나설 때
 
이보람   기사입력  2008/10/28 [12:02]
▲     © 단지12 닷컴

1948년 김구선생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에게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으로 안장하자고 제안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해방 이후 급변한 정세 속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데 남북이 공동으로 노력하자고 했던 것은 정치적 사상이 달라도 남과 북이 안중근을 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2005년 참여정부 시절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제 15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남북이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을 위한 공동조사단을 파견하자는 제안을 했고, 북측이 이 문제에 동의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후 2차례에 걸쳐 남북은 실제로 중국정부에 도움을 요청해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을 위한 남북공동조사단을 중국에 파견한 일이 있습니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기에 수많은 항일 애국투사들이 있지만 이들에 대한 남북의 역사적 인식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남북의 인식 차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만큼 안중근의 민족정신은 남과 북이 공히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안중근 의사는 남북이 함께 존경하는 분이다”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그런 표현 모두가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여타 항일투쟁 애국지사와 달리 조국의 독립 뿐 만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주장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1910년 전후 국권회복운동, 독립운동, 항일운동이란 말이 주로 등장했을 당시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이등박문을 죽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 평화를 주창했다는 것은 안중근 의사의 사상을 연구할 때 매우 중요한 대목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정치사에서 평화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중요하게 사용되었는가를 연구한다면 아마도 안중근 의사가 원조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의거 후 5개월 동안 여순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수감 중의 짧은 재판 일정을 거쳐 사형을 선고 받고 항소를 포기한 대신 동양평화론을 기술했습니다.
일본 측이 당초 약속을 파기하고 사형집행을 앞당김에 따라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미완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동양평화론의 서문 등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에 대한 굳건한 신념이 녹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 인근에 있는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인류공동의 번영을 위한 동양의 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처단한 것이라고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강력하게 부여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동양평화론」저술은 6회에 걸친 재판과정을 끝내고 여순 지방법원 법정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진 뒤부터였습니다. 사형집행 10여일을 남기고 31살의 대한 청년이 수감생활 속에서 동양평화를 노래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평화를 갈구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형수 안중근 의사가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리고 쓴 미완의 저술, 동양평화론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성패는 만고에 항상 정해진 이치이다. 오늘날 세계는 동서로 갈라지고, 인종이 각각 다르며, 서로 경쟁하기를 밥 먹듯 하며 이기(利器)연구에 농상보다 더욱 열중하여 새로 전기포(電氣砲), 비행선(飛行船), 침수정(浸水艇) 등을 발명하고 있으니, 이것들은 사람이나 사물을 상해하는 기계들이다. 젊은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쟁터에 몰아넣어 수 없는 귀중한 생령들이 희생물처럼 버려져, 피가 내가 되어 흐르고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어 그칠 날이 없다."
 
 
안중근 의사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있어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 속에 국제사회가 자국의 이익과 발전을 위하여 약소국을 제물로 삼는 시대적 상황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 인류의 공동번영이란 대전제가 되는 가치들은 무시한 전쟁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반대한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핵심은 한국, 중국, 일본 3국이 동양평화를 위해 공동노력을 통해 공동번영의 길을 가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동양 평화론에서 강조하는 중심 내용에는 마치 국제연합(UN) 유럽연합(EU)에서 볼 수 있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31살의 대한청년의 가슴 속에서 나온 제안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오늘 날의 정책으로 시행해도 손색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 내용 중에는 동북아 공동안보체제 형성과 국제 평화군을 창설하자는 것도 있고, 동북아 개발은행 설립과 공동화폐를 발행하자는 제안도 들어있고, 공동의회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요즘 표현대로라면 능히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남을 만한 “전쟁반대 평화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저술이 미완으로 마감된 것처럼 지난 100년 동안 동양의 평화는 정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양평화를 가장 위태롭게 했던 것은 안중근 의사의 조국인 한반도였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그것이고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는 전쟁상태(휴전상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남과 북은 안중근 장군의 동양평화론을 중심으로 전쟁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평화시대를 열어야 할 때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일본 중국 한국 3국을 중심으로 제안한 평화정착 방법론을 이제 남북통일 추진 방법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면 남북통일 추진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동북아 공동안보체제 형성과 국제 평화군 창설”은 남북 휴전상태를 종결한 후 평화협정 속에서 남북연합군 창설로 이어질 수 있고 “동북아 개발은행 설립과 공동화폐 발행 사업”은 남북합작 통일은행설립과 통일화폐발행으로 이어져 남북경협을 통한 남북공동발전의 원동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동양 3국의 공동의회”도 제안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남북 공동의회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당시 분쟁지역이었던 중국 여순지역을 공동관리 지역으로 선포하지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제안을 분쟁지역인 비무장지대를 개발해 남북통일 기반조성과 확대를 위한 평화도시로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공동번영의 정책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습니다.
 
남북교류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던 김대중 정부시절 대북포용정책과 노무현 정부의 남북공동번영정책이 일방적인 남측의 대북 퍼주기 정책으로 일부에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남북문제는 공동협력 공동번영의 인식과 필요에 공감을 할 때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일방적인 포용, 일방적인 지원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남북이 함께 민족지도자로 모시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기초로 남북통일에 접근하는 것이 계기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형제 간에 사이가 좀 어색한 일이 있더라도 조상님 제삿날에는 얼굴 맞대고 만나 소원했던 관계를 청산하는 것처럼 남북은 남북이 함께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 민족 정신 앞에 나란히 앉아서 가슴을 열고 남북 하나되기 방안을 강구해보자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남북이 공동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작업에 나선 것처럼 이제는 안중근 의사 민족정신 찾기에 남북이 함께 나서야 할 때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민족정신 속에 남북분단의 고리를 풀고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열쇠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명지대학교 문화에술대학원 4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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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10/28 [12:02]   ⓒ 안중근청년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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