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버지의 서가에는 빛바랜 초록색 표지의 ‘조선총독부’ 다섯 권이 꽂혀 있었다. 지은이는 유주현. 막 독서에 흥미를 느끼던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그 소설에 도전했지만, 완독에는 실패했다. 덕분에 그 첫 장면은 수없이 읽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하얼빈 역, 프록코트를 입은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일곱 발의 총성. 지금도 내게 그건 기나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지난 10월 1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슬라비안카로 가는 카페리 객실에 앉아 끝내 읽지 못한 그 소설을 떠올렸다. 내가 안중근에 대한 소설을 쓴다면, 첫 장면은 막 잘려나간 왼손 무명지 첫 마디에 대한 묘사가 될 것 같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손가락. 나는 연추(러시아명 얀치허) 하리(下里)를 출발해 하얼빈을 거쳐 뤼순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안중근의 행로보다는 그 손가락의 행방이 더 궁금했다.
안중근이 김기룡, 강기순, 박봉석 등 결사동지 11명과 손가락을 자른 것은 1909년 2월 7일의 일. 안 의사가 옥중에서 쓴 자서전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를 자른 뒤 생동하는 선혈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글자 넉자를 크게 쓰고 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부른’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한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오늘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맹서하자”며 일제히 손을 끊었다.
안중근은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에게 신문을 받으며 단지동맹을 맺은 곳이 러시아와 중국의 경계인 연추 하리라고 했다.
옌치아,연추, 카리, 하리 등으로 알려진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지금의 크라스키노 부근이라는 게 대체적인 추측이다.
항구도시 슬라비안카에서 크라스키노까지는 50㎞ 남짓. 표지판도, 가로등도 없는 비포장도로를 먼지구름과 함께 1시간 남짓 달리다보면 차창 밖 밤하늘에 은하수가 무더기로 쏟아지는 변경이다.
중국 훈춘과 국경을 접한 크라스키노는 소읍이다. 조금만 내려가면 두만강이 나오고 그 너머는 북한 회령 땅이다. 그 탓에 19세기 말부터 기근에 시달리던 한인들이 들어와 땅을 개척했다. 하지만 둘러봐도 보이는 동양인이라고는 호텔에 머물며 자국에서는 금지된 카지노만 즐긴 뒤, 곧바로 돌아가는 부유한 중국인들뿐이다.
안중근은 이 소읍의 어디쯤에서 결의를 했을까. 크라스키노에서 훈춘 방향으로 마을을 벗어나면 바로 주카노프카 다리가 나오는데,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서는 2002년 바로 이 다리 옆에 불꽃 모양의 단지동맹 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정작 손가락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연추 하리를 찾으려면가야 한다. 주카노보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는 우리나라의 남양 알로에 농장이 있다. 농장장은 고려인이지만, 그는 안중근은 물론 인근에 300여 곳이나 번성했다던 고려인 마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뒤, 거기가 한인들이 일군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고려인은 거의 남지 않게 된 셈이다. 강제이주 후 러시아인들이 버려진 한인 가옥의 벽돌과 주춧돌을 날라다 새집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런 까닭에 주카노보 마을 주민들은 옛 한인들의 집터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기억하고 있었다. 주카노보 마을에서 만난 알렉세이(35)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를 따라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 억새밭을 헤치고 가면 거짓말처럼 우물, 맷돌, 벽돌, 못자리 등이 나왔다. 알렉세이는 내를 건너고 산모퉁이를 돌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길로 우리를 안내하더니 양옆으로 자란 억새에 가려져 잘 보이지조차 않는 작은 길, 그 길이 끝나는 산 밑을 가리켰다. 아, 연추 하리!
어릴 적, 성묘하러 갈 때면 길 가운데 자라난 풀 때문에 자동차가 쉽게 다니지 못하던 그런 풍경이 떠올랐다. 차에서 내려 길을 걸어가노라면 금방 새 소리와 풀 냄새와 손등에 와 닿는 바람 때문에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그런 길이었다. 모르긴 해도 안중근이 살았던 시절에는 양옆으로 논이 있었을 것이다. 이 맘 때쯤이면 한창 추수를 할 시기이니 그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풍성했을 것이고.
우리는 기슭을 향해 30분 남짓 서둘러 걸었고 거기에는 안중근이 무명지를 자른 동네가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담장으로 사용했음직한 돌무더기와 집터에만 자란다는 주황 꽈리가 홀로 피어 마을의 흔적을 전할 뿐.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12명 결행의 흔적은 모진 세월에 마모되고 말았다.
연추 하리에서는 나라를 잃고 유랑에 나선 조선인의 마음으로 산과 들을 바라봐야만 한다.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산을 뒤로 하고 양지 바른 곳에다가 집을 지었을 것이다. 연추 하리는 그렇게 지은 집들이 대여섯 채 서 있는 마을이었다. 회령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안중근은 그런 집 어딘가에서 나라를 위한 마음을 보이겠노라며 손가락을 잘랐다. 손가락은 아마도 그 들판 어딘가에 묻혔을 테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연추 하리에서 역사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 잊혀진 것들을 기억하는 일,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다. 안중근의 손가락이 묻힌 곳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억새밭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뿐이다. 바람이 불면 전면적으로 억새풀들이 몸을 누인다. 그게 바람이다. 바람은 인간의 길을 노래한다. 쉽게 변하든 그렇지 않든,인간은 걸어간 길을 통해 자신을 밝힐 뿐이다. 여기서 한 사람이 손가락을 잘랐다. 그 손가락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2) 세계를 뒤흔든 한 발의 총성
막 출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 호객 행위를 하는 택시기사, 북적이는 하얼빈 역. 불과 100여 년 전에 철도를 따라 건설된 도시의 아침 풍경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이란 끝없이 투쟁하며 문명을 만들어낸다는 명제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지난 1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기차가 먼 대륙의 평원을 18시간이나 달려 도착한 새벽녘 하얼빈 역. 무거운 짐 가방을 들고 플랫폼에 발을 디디는 순간, 네 발 조금 뒤 세 발의 총성, 그리고 ‘코레아 우라!’라는 고함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면 거기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 독립전쟁을 수행 중인 31세의 대한국인 안응칠(안중근)이 서 있다. 연추 하리 외딴 시골에 왼손 무명지를 두고 온 사내. 그는 의외로 침착하다.
얼른 철길을 건너 안중근이 던져버린 1900년 식 브라우닝 권총을 집어 든다. 주위에는 안중근이 쏜 총알의 탄피 일곱 개가 흩어져 있다. 서둘러 열어본 탄창에 남은 한 발의 총알. 이 총알의 얘기를 듣기 위해 연추 하리에서 하얼빈까지 기나긴 여행을 한 셈이다. 탄두에는 십자가 그어져 있다.
여러 가지 의문이 솟구친다. 안중근은 그 한 발의 총알로 자살을 할 생각이었나. 탄두의 십자는 그가 가톨릭 신자라는 걸 말해주는가. 그리고 7연발 반자동 브라우닝 권총이 남긴 일곱 개의 탄피와 마지막 한 발. 그것은 미스터리일까, 역사의 교훈일까.
브라우닝은 오전 7시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의 가슴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던 오전 9시까지 안중근은 가장 효과적인 저격 지점, 오직 그 한 가지만에만 골몰했다.
특별열차가 도착하자, 하얼빈에서 이토와 회담하기로 한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가 귀빈칸으로 올라가 이토를 영접한다. 코끝으로 스치는 영하 5도의 바람. 조슈 하급 무사 출신의 이토는 밀려드는 바람에 북국의 풍토를 체감했으리라. 그에게 코코프체프는 의장대 사열을 부탁한다. 마침 이토 도착 하루 전 가와카미 하얼빈총영사가 러시아 군경에 일본인 환영객을 검색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니 결과적으로 가와카미는 안중근이 브라우닝을 들고 플랫폼까지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토가 기차에서 내리자, 악대가 군악을 연주한다. 환영 음악과 함께 이토는 차례로 러시아 악대, 러시아 군대, 청나라 군대, 외교사절단의 순서로 사열한다. 그 순간 귀빈 대합실 한 구석에서 차를 마시던 안중근은 플랫폼으로 뛰쳐나온다. 공적을 향해 울리는 환영 함성이 그의 심장을 불타게 했다. 러시아 헌병대의 뒷부분에 도달한 순간, 이토 일행이 다시 돌아섰다. 2열로 받들어총을 하고 있던 러시아 군인들, 그 뒤로 보이는 백발의 이토. 안중근은 선두의 노인을 향해 네 발을 발사한 뒤 침착하게 주위 일본인들을 향해 다시 세 발을 쏜다.
이토의 몸에 박힌 총알은 현장을 이렇게 증언한다. 안중근은 이토의 정면이 아니라 옆에서 오른쪽 팔꿈치 위쪽을 겨냥해서 쏘았다. 이렇게 쏴야만 심장을 타격할 수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이토는 모두 세 발의 총알을 맞았는데, 모두 오른쪽 팔을 지나 폐와 복부에 박혔다. 총알이 폐부를 관통하지 않은 까닭은 안중근이 사용한 총알이 탄두에 덤덤탄이었기 때문이다. 인도 공업도시 덤덤의 무기공장에서 만들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덤덤탄은 표적을 맞추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명중하면 관통하지 않고 인체에 박혀서 탄체 내의 납을 분출한다. 비인도적이라는 이유로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서 사용을 금지시킨 탄알이다. 고종의 밀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묵살 당했고 안중근은 만국평화회의의 금지품으로 이토의 심장을 겨냥했다.
안중근은 모두 일곱 발의 총알을 쏜 뒤, 총을 버리고 ‘코레아 우라!’를 외치다가 러시아 헌병장교에게 붙잡혔다. 브라우닝은 7연발 권총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이 한 발의 의미는 무엇일까? 안중근은 팔꿈치 위쪽을 쏴야한다는 사실도, 덤덤탐이 목표물을 즉사시킬 수 있다는 것도, 러시아인 대신 일본인만 골라서 저격할 침착함도 가진 명사수였다.
일본인 검찰관은 “자살하기 위해 한 발을 남겨둔 게 아니냐.”고 다그쳤지만 안중근은 그 말을 부정했다. 재판 과정에서 시종 거사의 정당성을 설파했던 그가 자살을 꿈꿨을 리는 없다. 총알을 장전하던 안중근은 무슨 수가 있어도 이토를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그건 최대한 사격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7연발 권총에 최대한 장전하는 방법, 그건 약실에 한 발을 넣어놓고 탄창에 일곱 발을 넣는 일이다. 네 발,세 발,그리고 나머지 한 발. 약실까지 가든 채운 여덟 발의 총알은 빈틈없이 장전한 분노이거나, 혹은 대륙을 떠돌던 망국의 한이었을 것이다.
일곱 발을 쏜 뒤 안중근은 멈췄다. 영웅은 남은 전쟁을 위해 한발을 아껴뒀다. 안중근이 가장 먼저 탄창에 집어넣었을 마지막 한 발은 그 전쟁이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 마지막 한 발은 수천 발의 총알이 될 것이며 안중근의 죽음은 수많은 안중근을 낳을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정당성은 여기에 있다. 마지막 한 발은 결코 한 발이 아니었다. 안중근은 개인이 아니었다. 그건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수천 발의 총알이었으며 안중근은 모든 독립운동가를 대표한 보통명사였다. 그리고 그 전쟁은 계속된다.
(3) 운명의 선로…기차는 운명을 향해 마주 달렸다
객실 승무원만이 오갈 뿐,불이 꺼진 침대칸은 조용하다. 기차는 앞으로만 나아간다. 반성하지도, 회고하지도 않는다.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안중근의 일화에는 이런 게 있다. 뤼순감옥으로 호송되기 위해 기차에 올랐을 때, 일본 헌병이 “너 같은 자에게도 가족이 있을 게 아니냐?”며 물었다. 안중근은 “내게는 아내도, 자식도 없다”고 대답했다.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란 그런 것이다. 오직 앞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기차의 운명이란 어떤 것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로를 따라온 기차는 우스리스크에서 철로를 바꿔 중국 쪽으로 향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도시인 수이펀허에서 하얼빈 사이를 운행하는 중국 기차의 꽁무니에 붙는다. 그리고 다시 기차는 무단쟝을 거쳐 하얼빈에 이른다. 거기서 다롄에서 출발해 선양, 창춘을 거쳐 온 또 다른 선로와 만나게 되면 기차의 운명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 선로를 부설한 러시아는 이를 동청철도라고 불렀다. 하얼빈에서 갈라지는 동청철로의 한 갈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고, 다른 갈래는 다롄에 이른다. 제정 러시아가 따뜻한 바다를 얼마나 갈구했는지 이 철길의 모양새를 보면 알 수 있다.
1909년 10월 21일, 그 두 개의 항구 도시에서 각자 기차에 올라탄 두 사람이 있다. 목적지는 같았으나, 여행 목적은 전혀 달랐다. 한 사람은 생의 마지막 야망을 대륙에서 실현하려고 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생을 소멸시키려고 했다. 몇 번의 우연을 거쳐 결국 그들은 10월 26일 아침, 하얼빈에서 만나게 되지만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두 사람이 하얼빈에서 만나게 된 것은 필연적이다.
나라를 잃고 먹고 살 길을 찾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 한인들은 아무르만이 보이는 남쪽 바닷가에 정착했다. 대부분은 미역을 따서 훈춘에 내다파는 어민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세찬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움막집처럼 그들의 운명도 늘 흔들리고 있었다. 1909년 10월 19일, 안중근은 연추 하리의 집을 떠나 배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렀다. 개척리에 있던 한인신문사인 대동공보사에 들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동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안중근이 자신의 운명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깨닫게 된 순간이다. 이 때 안중근은 아내도, 자식도 없이 목적지를 향해 앞으로만 달려가는 기차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역사는 안중근의 모든 것을 가져가버렸다. 연추 하리와 마찬가지로 블라디보스토크에도 그의 자취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비장한 마음으로 안중근이 오갔을 거리에는 경기장과 해산물시장이 들어서 있다. 이 곳 사람들에게 한국인 얘기를 물으면 얼마 전 공연차 다녀간 서태지 얘기를 들려줄 뿐이다. 안중근은 없다. 다만 바뀌지 않은 게 있다면 온몸을 날려버릴 듯 불어오는 바닷바람이다. 온몸이 뒤틀린 블라디보스토크의 나무들은 그 바람의 생김새를 잘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안중근의 결심을 통해 당시 개척리에서 힘들게 살아가던 한인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풍경의 반대편에 뤼순 203고지가 있다. 다롄에 접한 천혜의 군항 뤼순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으로 러일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다. 일본군은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1만8000명의 목숨을 내놓았다.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를 찾아가는 한국인 관광객은 드물지만, 뤼순 203고지에는 일본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듯 장사치들은 곧잘 일본어로 말을 건다. 그런 점에서 개척리와 203고지는 대척지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이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가는 차표를 얻기 위해 개척리에서 동분서주하던 10월 20일, 이토 히로부미는 이 203고지에 올라 “오랜만에 듣는 203고지/1만 8천 명의 뼈를 묻고 있는 산/오늘 올라보니 감개가 무량하다/하늘을 바라보니 산머리에 흰 구름이 둘러져 있네”라는 시를 남겼다.
침울한 분위기의 블라디보스토크와 달리 다롄은 활기가 넘친다. 고속 성장하는 중국의 현재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게 사라진 블라디보스토크와 달리 다롄에는 옛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다롄의 중심가인 중산광장이 서면 이토의 감개무량이 어떤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10월 19일 다롄에 도착한 이토는 환영객들 앞에서 “만주의 평화는 극동의 평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그 날,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안중근이 생각하던 평화와는 아주 달랐다. 안중근은 한국 중국 일본이 서로 협력하고 도와줄 때, 극동에는 평화가 온다고 믿었다. 서로 상반된 그 두 개의 평화론은 결국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기차 안, 코 고는 소리, 몸을 뒤척이는 소리, 한숨 소리 등만 간간히 들려올 뿐, 객실 안은 쉬지 않고 선로를 달리는 기차 소리만 가득하다. 인기척에 문득 고개를 돌리니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에게는 아내도, 자식도 없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내. 조국을 위해서 왼손 무명지를 잘라낸 사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사내. 그런 사내가 가만히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대륙의 밤을 바라본다.
같은 시간, 대륙의 저편에서는 어떤 운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두 개의 기차가 하나의 선로를 따라간다. 그들의 평화, 그들의 조국, 그들의 야망이 서로 마주보고 달리고 있다. 하얼빈에서 그 두 기차는 서로 만날 것이다. 그 운명의 순간을 향해 기차는 반성도, 회고도, 후회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광야 위를 계속 달려갈 뿐이다.
(4)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하얼빈에 도착한 10월 22일 밤부터 이토를 저격한 10월 26일 아침까지 안중근은 수많은 우연과 맞닥뜨리게 된다. 10월 22일, 세관을 통과하느라 쑤이펀허에서 기차가 정차하자, 안중근과 우덕순은 유동하를 끌어들였다.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일행은 마차를 타고 당시 하얼빈한인회 회장이던 김성백의 집으로 향했다. 김성백의 집은 도리구 삼림가에 있었다. 하얼빈 역과 쑹화강 부두가 있는 도리구는 수많은 골목들로 이뤄진 구역이다. 그 골목길의 모습은 지금도 그대로다. 하얼빈 역에서 삼림가까지는 마차로 15분 남짓 걸리는 거리다.
당시에는 가로에 불빛이 없었으니 안중근 일행은 먹빛처럼 짙은 어둠 속을 달려 김성백의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당시 하얼빈의 인구는 4만 명. 그 중 한인의 수는 268명이었다. 이주 농민들이 정착한 만주의 다른 지역과 달리 하얼빈에는 일거리를 찾아 떠도는 노무자들이 많았다. 삼림가 김성백의 집은 그런 노무자들에게는 일거리도 구할 수 있고 숙식도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음날인 23일은, 안중근 드라마 중 가장 평온한 날이었다. 안중근 일행은 김성백의 집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떨어진 하얼빈 공원으로 갔다. 지금 그 길로는 겨울을 대비해 하얼빈 시내의 난방수를 공급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얼빈 공원은 중국 공산당 혁명가 이조린의 이름을 따 현재 조린공원으로 불린다.
안중근은 23일 딱 하루 이 하얼빈 공원에 갔을 뿐이다. 그런데 안중근은 한국이 독립될 때까지 자신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날,안중근은 하얼빈 공원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조린공원을 찾은 지난 10월 15일,북방의 가을은 이미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낮이 짧아지기 시작해 벌써부터 한 뼘의 햇살도 아쉬웠다. 거기 어딘가에서 안중근은 따사로운 생의 한 때를 마지막으로 즐겼으리라. 안중근에게도 희로애락이 있었다. 연못을 비추고 되튀는 가을 볕처럼 머릿속을 오가는 수많은 감정들과 안중근은 작별하는 의식을 치렀다.
죽어서 하얼빈 공원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말은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를 완성한 뒤, 다시 희로애락이 있는 평범한 인간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었으리라.
하얼빈 공원에서 인간으로서 마지막 햇살을 즐긴 안중근은 공원 앞 사진관에서 우덕순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민족의 원수 이토를 저격하는 일뿐이었다. 애당초 안중근은 창춘 부근 관성자에서 이토를 저격할 생각이었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관성자 이남의 동청철도가 일본의 손에 넘어간 까닭에 관성자 이남과 이북의 선로 폭이 서로 달랐다. 따라서 이토는 관성자에서 기차를 갈아타야만 했다. 하지만 여비를 구하지 못한 안중근 일행은 상하행선이 모두 정차하는 큰 정거장까지 가는 표를 끊었다. 그 표는 삼협하까지 가는 표였으나 중간에 차이자거우에서도 기차가 정차하는 것을 알게 된 안중근 일행은 거기서 하차했다.
차이자거우는 하얼빈에서 84㎞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주 작은 역이다. 막상 가보니 그 역이 너무나 작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된다. 이토의 특별열차가 멈출 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중국 노인이 있어 불러 세웠더니 마침 1956년부터 철도 노동자로 일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가 이 작은 역에서 무조건 정차한다고 하는데,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는 역 건물 맞은편의 너른 공터를 가리켰다.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그 공터에는 석탄이 잔뜩 쌓여 있었다고 했다. 차이자거우 역은 석탄을 공급하는 역이라 상하행선 기차가 반드시 멈췄다고 했다.
차이자거우 역은 그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안중근,우덕순,조도선 세 명은 24일 그 역에 도착해 역 건물 지하의 여관에 묵었다. 여관이 있던 자리는 지금 보일러실로 쓰이고 있다. 거기서 하룻밤을 보낸 뒤,안중근은 우덕순에게 두 번의 기회를 노리자고 했다. 자신은 하얼빈에서,우덕순은 차이자거우에서 각기 기다리고 있다가 기회가 닿는 대로 이토를 저격하자는 뜻이었다. 이 말에 우덕순도 동의했고 25일 안중근은 다시 하얼빈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눈물겨운 이별은 러시아 측 자료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친구들은 안중근과 작별을 고하였다. 그들의 작별은 감명을 주는 점이 있었으며,목격자들에게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안중근은 몇 번 공손한 인사로 답례했으며 이에 대해 그의 동반자들도 똑같이 답례했다. 그의 얼굴은 슬퍼보였고 눈에는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안중근은 4번 열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떠났다.”
우덕순과 조도선은 그들을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헌병들에 의해 여관방에 감금됐다가 거사가 일어난 직후 체포됐다. 차이자거우에 남아 있었다면,안중근도 마찬가지 신세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중근은 용케도 그 모든 실패의 확률을 피해서 10월 26일 9시 30분,하얼빈 역 플랫폼까지 무사히 들어가 얼굴도 모르는 이토를 즉사시킬 수 있었다. 역사에 우연이란 없다. 오직 필연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하얼빈 공원에서 돌아온 날 저녁,안중근이 지은 ‘장부가’의 한 구절은 그가 이미 그 역사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영웅의 길에 우연은 없다.
(5) 위국헌신군인본분
다롄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뤼순은 여전히 지난 세기의 전쟁을 잊지 못하는 듯하다. 뤼순 관광가이드북에는 온통 전쟁과 식민의 기억뿐이다. 러시아 원동총독부,러시아 관동주 민정청,일본 관동군 사령부,일본 관동도독부 등의 건물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한국인이 이 건물들을 관광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군항이라는 이유로 뤼순은 외국인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뤼순감옥은 뤼순항이 굽어보이는 시내 뒤쪽 언덕에 있다. 랴오둥반도를 조차한 제정 러시아가 1902년부터 짓기 시작한 건물이지만,결국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04년 러일전쟁 패전 뒤 일본에 넘겨줬다. 일본은 이 짓다만 건물을 1907년에 완공해 관동도독부 감옥서라고 이름 붙였다. 대지 22만 6000㎥,건평 1만1400㎥에 달하는 감옥으로 동북지방에서는 규모가 제일 컸다. 방사형으로 놓여진 감방을 가운데 선 간수가 모두 감시할 수 있는 형태로 지금도 그 원형이 유지돼 있다. 아래층이 보이는 복도를 밟고 지나가노라면 벽에 걸린 혁명가들의 사진과 약전이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 일제 점령기 동북지역 중국인 혁명가들이지만,신채호 같은 한국인들의 사진도 볼 수 있다.
동양의 아우슈비츠라고도 불리는 뤼순감옥의 악명이 시작된 것은 아무래도 안중근을 수감하면서부터일 것이다. 1909년 11월 3일,뤼순감옥에 압송되면서 안중근의 기차 여행은 끝이 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뤼순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은 14일이었다. 뤼순감옥 측은 안중근을 위해 기존의 감방이 아닌 새로운 감방을 만들었다. 그 감방은 뤼순감옥을 다 돌아보고 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뜰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온다. 창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면 침대와 창문 앞에 놓인 책상이 보인다. 1910년 3월,안중근은 늘 그 책상에 앉아서 옥중기를 썼다.
안중근이 쓴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마음이거늘 밝은 세계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안중근이 말하는 밝은 세계란 뤼순감옥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빛,거사 직전 하얼빈 공원에서 봤을 가을볕,혹은 연추 하리 드넓은 평원에서 흔들리던 하얀 억새 물결 같은 것이리라. 그처럼 환하게, 어떤 증오나 두려움도 없이 자기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었으리라. 다롄에 도착한 이토가 말한 평화안, 즉 러시아와 일본이 사이좋게 만주와 한반도를 점령해서 생기는 평화와는 전혀 달랐다.
뤼순감옥 길 앞에서 한국인은 입을 열 수도 없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가이드가 온몸으로 이를 제지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을 거쳐 뤼순까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안중근의 그리고 조선인들의 흔적을 감추려고만 든다. 여전히 국가는 서로 배타적이다. 국경만 넘어가면 평화가 달라진다. 그런데도 안중근은 감방 볕이 잘 드는 책상에 앉아 동양 3개국이 서로 도우며 살아갈 때,동양에 평화가 올 것이라는 글을 썼다. 어쩔 수 없이 안중근은 착한 사람이다. 20세기 초 나라를 잃고 만주와 연해주로 떠돌던 조선인들도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안중근이 무자비한 테러리스트일 수는 없다. 그건 안중근 공판에서도 알 수 있다. 안중근 공판은 1910년 2월 7일부터 열렸으나,일본 정부가 안중근에 대한 처리 방침을 정한 것은 그 전 해 12월이었다.
한일병합안을 기정사실화한 일본 정부로서는 안중근의 생존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2월 14일,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건 발생 111일만이었다. 한국병합을 위해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는 자체가 이미 안중근의 거사가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국가의 문제라는 걸 일본 법정이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면 그에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을까. 그러나 옥중의 안중근에게 공포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는 항소를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으나,‘동양평화론’을 다 쓸 수 있을 만큼의 시간만 달라고 했다. 자신은 해야 할 일만 하면 된다는 투였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거나,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던 책을 실컷 봤으면 좋겠다는 식의 얘기는 없었다. 그 담담함은 과연 어디서 비롯됐을까.
일본인 간수 치바 도시치는 그 담담함에 감화 받아 오래 전부터 안중근에게 글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했다. 1910년 3월 26일,마침내 안중근은 치바의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말했다. 안중근은 비단 천에다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고 쓰고 왼손을 찍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이 마땅히 할 일이다. 안중근의 담담함은 거기서 나왔다. 자신이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순간,안중근은 아무런 회한도,후회도 없이 그 길을 걸어갔다. 바로 그 날,모친이 보낸 하얀 명주 한복을 입은 안중근은 짧았던,하지만 위대했던 여정을 마무리했다.
안중근의 책상으로는 언제나 밝은 빛이 드리워진다. 안중근은 그 빛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안중근이 사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사랑한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 암울한 시절에도 안중근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마치 어두운 감방으로 드리워지는 한 줄기 빛처럼. 그 빛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역사는 그가 본 그 밝은 빛을 기억할 것이다. 영원히. <소설가 / 김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