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려고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열들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는 안중근 의사이다.
안의사의 본관은 순흥이고 고려조 명유 문성공 안향의 26대손이다. 안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문명이 높던 성균진사 안태훈과 백천조씨의 장남으로 탄생하였다. 조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 공으로 덕망이 칭송되던 분이다.
안의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걸쳐 검은 점이 7개 박혀 있어 북두칠성에 응한 것이라 하여 아명을 응칠이라 불렀고, 망명 후 구국활동 때 이 이름으로 행세하였다.
안의사는 나이 6살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으로 이사해 산수풍경이 가려한 천봉산 밑 청계동에서 성장하였다. 일찍부터 글을 배워 사서삼경과 통감을 통달, 문사의 앞날도 기약 하였다. 그보다 어려서부터 말타기 활쏘기를 익혀 무사의 기상을 높이었다.
1894년 안의사의 나이 16살 때에 동학혁명을 빙자한 지방무리들의 소요가 일어나자 안의사는 부친이 모집한 장병을 이끌고 선봉장으로 용전하였다. 그해 김홍섭의 딸 김아려 규수와 결혼하였다. 그후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명을 도마(多默 : Thomas)라고 하였으며, 조셉 빌렘(洪錫九) 신부에게서 불어를 배우고 서구의 새로운 지식도 넓혔다. 또한 빌렘 신부를 따라 선교활동에도 힘썼다.
그후 10년이 지나 1905년 안의사의 나이 27세 때 을사5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듣고 일제의 불법침략을 세계에 알리며 구국 방도를 찾고자 상해로 건너갔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 집을 진남포로 옮기고 가산을 기울여 돈의 학교와 삼흥 학교를 세워 구국영재 양성에 전력을 쏟았다. 한편 국채보상운동에도 가담, 관서지부를 조직하고 보상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나라는 더욱 기울어 1907년 8월, 군대 강제 해산의 참상까지 목도하게 되었다. 가슴에 끓는 피를 간직한 29세의 안의사는 최후의 구국 결의를 다지며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에 나아가 국외에서의 의병대열에 참여하였다.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의 직함을 띠고서 무장 항일투쟁을 결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듬해인 1908년 7월에는 의병 300여명을 인솔하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육진 지역에 진군, 경흥 등지에서 일군경과 교전, 몇차례 승첩을 올렸다. 그러나 회녕 영산의 대회전에서 중과부적으로 패퇴, 12일 동안 겨우 두끼를 먹으면서 두만강을 건너 의병 본영에 생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의사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이듬해 초봄 한인이 연추라고 부르는 연해주 크라스키노 하리 마을에서 조국독립을 위한 결사동지들과 단지동맹을 하여 동의 단지회를 결성, 회장을 맡았다.
안의사를 비롯하여 김기룡, 백규삼, 강창두, 조응순, 황병길,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각기 한 칼로 잘라내어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국만세'를 삼창하고 조국독립에 헌신하기로 혈맹한 것이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안의사는 이등박문이 러시아의 대장대신 꼬꼬프체프와 만나 동양침략정책을 논의하려고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때야말로 나라와 겨레의 원수를 갚을 호기로 판단, 우덕순 동지와 함께 하얼빈에 나아갔다.
마침내 역사적인 의거일인 1909년 10월 26일 오진 9시, 삼엄한 경계망을 편 하얼빈 역두에 한국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토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멎었다. 이토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하차하여 앞에 군악을 울리며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이어 각 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악수를 하며 인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안의사는 러시아 의장대의 뒤에서 의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안의사는 이토가 10보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찰라 전광석화와 같이 권총을 꺼내들고 이등을 향하여 연발 의탄을 쏘았다. 첫발이 이토의 가슴을 명중시켰고 제2발도 그의 흉부를 맞췄다. 또한 제3발도 그의 복부를 관통시켜 이등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안의사는 순식간에 침략자의 응징장으로 변한 현장에 이등이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대한국만세'를 3번 외치고 태연자약하게 러시아 헌병에게 포박되었다가 곧 일제 관헌에게 넘겨졌다.
안의사는 재판에서 '나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이고 특파독립대 대장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적의 괴수 이등박문을 총살 응징한 것이다' 라고 밝혔다. 안의사의 이 의거는 온 겨레는 물론 중국인민들도 기뻐해 마지 않았다. 그 보다도 안의사의 이 의거는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비롯하여 동양평화 파괴의 괴수를 단죄 응징한 것으로 한국근대사에서는 물론 한·중·일·러를 포함하는 동양근대사에서 중요한 대목이 된다. 안의사는 여순재판에서 이 이토의 죄상을 15가지 조목을 들어 낱낱이 단죄하고 침울한 감방에서 『안응칠역사』라고 표제한 자서전을 기술하여 자신의 떳떳한 행적과 이등 총살의거의 뜻을 밝혔다. 이어 일인의 위약으로 미완인 채 끝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안의사는 감방에서 그의 높은 기품을 담은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와 「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등을 비롯한 수십편의 신품과 같은 유묵을 썼다. 일제의 무도한 재판은 1910년 2월 14일 겨우 6회 개정으로 안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동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에게도 징역이 언도되었다. 의거 후 5개월에 걸쳐 여순감방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오히려 늠름하기만 하던 안의사는 2천만 동포에게 뼈에 사무치는 유언을 남기고 새 한복으로 갈아입고 여순형장에서 조용히 순국하니, 때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이고, 향년이 32세이다.
비록 육신의 일생은 그리 길지 못하였으나 숭고한 정신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혈육은 준생 현생의 오누이와 손자 웅호 뿐 이지만 민족정기의 후계자는 만대에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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